예화

TOP
DOWN


근대교육과 기독교

본문

한국에 상륙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끼친 수많은 영향 가운데 가장 괄목 할 만한 것은 근대교육기관의 설립과 한글의 대중화라고 할수 있다.1884년 고종으로부터 병원과 학교사업을 허락받은 선교사들은 육영사업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한다.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직접적인 선교는 할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글을 배우면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조금씩 가르치기 시작했다.그들은 제중원과 정동진료소(시병원)의 교사로 있으면서 1885년말부터는 2~3명씩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당시 공부하려고 선교사를 찾아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 영어를 배워 출세를 하려는 사람들이었다.1886년 아펜젤러가 본국 선교부에 보고한 내용은 당시의 상황을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한국인들 사이에 영어를 배우려는 열정이 강하게 일고 있습니다.새로운 언어에 대한 부족한 지식이 출세의 걸림돌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그런 형편입니다.한국인에게 `왜 영어를 배우려 하시오'라고 물으면 거의 공통 된 대답이 벼슬을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선교부를 찾아온 사람들이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본격적인 학교설립은 아펜젤러에 의해 추진된다.그는 1884년 6월24일 선교여부를 타진하러 일본에서 내한했던 맥클레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미국공사 푸트에게 부탁해 매입한 한옥(지금의 정동1의 11)에서 1886년 6월8일 2명의 학생으로 정식 학교를 시작했다.이것이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인 배재학당이다.배재학당은 문을 열자마자 학생들이 몰려들어 5개월만에 학생수가 32명에 이르렀다.이들 학생들은 성경을 읽거나 선교사들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인이 되어 갔다.1887년 7월 24일 세례받은 박중상과 그해 10월 2일에 세례받은 한용경이 대표적인 인물이다.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회 언더우드선교사는 1886년 5월11일 정동에 한옥을 구입하고 학생 1명으로 학교를 시작했다.이 학교는 고아나 빈민자녀를 위한 일종의 기술학교형태로 언더우드학당,예수교학당,민로아학당,구세학당이란 이름으로 불렸다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오늘날 경신학교로 발전했다.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온 미국 감리교 최초의 여선교사 스크랜튼부인도 한국여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키로 결심하고 1886년5월31일 여학생 1명으로 학교를 시작했다.이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다.1886년을 기점으로 해 한국에는 잇따라 학교가 세워진다.1887년 6월 엘러즈에 의해 북장로회의 서울연동여학당(정신여고)이 설립됐다.학교설립은 장로교와 감리교선교사들에 의해 지방으로 확산됐다.장로교는 경신학교 정신학교에 이어 부산동래에 일신여학교(1895년),평양에 숭덕학교(1894) 숭실학교(1897) 평양신학교(1901) 숭의학교(1903)를 세우고 다시 중소도시로 내려가 재령에 명신학교(1898) 목포에 정명학교(1898) 원산에 진성여학교(1904) 대구에 계성학교(1906) 신명여학교(1907) 선천에 신성학교(1906) 보성여학교(1906) 광주에 수피아여고(1907) 전주에 신흥학교(1908) 기전여학교(1907) 마산에 창신학교(1908)를 세웠다.감리교는 서울에 배재학당 이화학당을 세운뒤 공옥학교(1896) 배화학교(1898) 신군학교(1897)를 창학했다.그리고 평양에 광성학교(1894) 정의여학교(1894) 정진학교(1896) 맹아학교(1894),인천에 영화여학교(1897),원산에 루씨여학교(1903) 덕명학교(1904),개성에 호수돈여학교(1904) 미리흠학교(1906) 한영서원(1906),해주에 예창학교(1904) 예정학교(1909),공주에 영명학교(1905)등을 설립했다.이밖에도 선교사들은 1910년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일제에 빼앗길때까지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워 서양의 근대문화와 기독교정신을 일깨웠다.기독교가 펼친 교육사업은 성서번역을 통해 한글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다.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훨씬 전 중국 심양에서 존 로스목사의 성경번역에 가담했던 백홍준 서상륜등이 쪽복음형태로 한글성경을 가져와 사용하고 있었다.최초의 선교사로 들어온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만주와 일본에서 번역된 성경을 개정하는 작업을 했다.1887년 선교사들은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번역작업에 나서 1890년 `누가복음젼' 1892년  `마태복음젼'이 나왔다.1895년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시험역본으로 나오고 1900년에는 신약전체가 한권의 책으로 나왔다.성경은 지식계층이 아니라 민중들이 알수 있도록 널리 통용되는 문체들을 사용해 한글의 대중화를 가져왔다.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사학들은 민족의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장소였다.백낙준 김활란 백영엽 김필순 김마리아 남궁혁 이승만 김창식 김창근 김재준 안익태 김규식 길선주 이만집 박형룡 윤석구 박연세 유여대 함태영 이윤영 윤동주 박순천 문익환 한경직 방지일 한갑수 박화성 김말봉등 수없이 많다.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교육은 1910년까지 전국적으로 수많은 학교들이 세워지면서 한국근대교육을 확산시켰다.기독교학교는 1910년에서 30년대까지는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하면서 민족교육의 동반자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나갔다.이처럼 한국근대교육의 효시를 이룬 기독교학교들은 1960년대 이후 거세게 몰아닥친 세속주의 물결에 밀려 일부는 퇴보하기 시작했다.1970년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에 밀리고 80년대 정보화 물결에 밀려 사회의 정신적 중심에서 서서히 물러서게 됐다.그 결과 부정부패나 무능의 문제를 바로잡아 나가지 못했다는 기독교 내부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이제 한국의 근대교육을 이끌어 온 기독교계 학교는 21세기 문화·정보혁명의 시대를 맞아 기독교영성과 성경 교리를 강조하고 성령충만한 교육의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 가야한다.그렇게 될때 현재 철학과 개성이 없는 교육,인성교육의 부재로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정책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잃어버린 `민족교육의 중심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3,499 건 - 539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