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본문
적용인내는 마음의 여유에서 시작한다. 모든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만이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인내할 수 있다.터키 이스탄불의 가구점에서 한국 장롱 비슷한 옷장을 팔고 있기에 들어가 서랍을 열어보려 했다. 열리지 않아 힘을 들여 당기고 있었더니 주인이 와 어깨를 툭 치며 지금은 우계라 열리지 않는다. 꼭 열어보고 싶으면 석달후에 오면 수월하게 열어볼 수 있다. 이스탄불 사람은 우계동안 쓰지않을 돈이 있으면 이 서랍에 넣어두면 자물쇠 없이도 보존이 된다 했다. 그 사람들의 정신적 느림이 피부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 말끝마다 야와시! 야와시! 하기에 무슨 말이냐 했더니 천천히! 천천히!란 말이라 했다. 이 모두 한국과 대조되는 느림문화의 표출이 아닐 수 없다.우리나라는 말끝마다 빨리 빨리 하는 서두름문화의 종주국인지라 이 한국병을 경계하고 느림을 부추기는 문화도 발달해 있었다. 좌의정 정탁이 남명 조식에게 사사를 마치고 벼슬을 위해 슬하를 떠나갈 때 '내 자네를 위해 소 한마리 뒤란에 매어놓았으니 몰고가게나' 했다. 뒤란에 가보니 매어놓았다는 소가 보이지 않는지라 두리번거리고 있자 '자네는 기가 세어 매사를 서두르는 것이 흠인지라 마음의 소를 주는 것이니 평생 반려 하게나'했다. 이 마음의 소가 아니었던들 나의 인생은 전혀 달라져 있었을 것이라고, 만년에 정탁은 느림의 상징인 마음의 소로 서두름을 극복해낸 일생을 회고했다. 정월 대보름 날 천자문을 읽으면 아홉번을 읽고, 빨래를 하면 아홉가지를 빨고, 새끼를 꼬면 아홉발을 꼬며, 나무를 하면 아홉짐을 하는 아홉차례라는 세시민속이 있었다. 어떤 일이건 한두번은 서두르게 되고, 서두르다 보니 서너번은 힘이 들고, 힘이 드니 대여섯번은 하기 싫어지고, 싫고보니 일곱여덟번은 체념한채 하게 되고, 이 고비를 극복하면 천천히 하는 느림이 체질화되어 힘들거나 싫거나 체념없이 많은 일을 수월하게 해낼 수 있게된다 해서 아홉차례다. 느림문화의 민중적 존재방식인 것이다.모든 시대환경이 이 서두름문화를 가속시키고 있는 이때 조형예술로 이에 저항하는 느림문화를 표출하는 느림전이 열리고 있어, 그 미적 가치보다 사상적 가치에 조명을 대어 한국의 느림문화를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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