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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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인사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한다며 교수실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우리들이 강의를 듣고 있던 정오 무렵이었다.“그날 그 시간에는 선약이 있습니다”Y교수님의 거절은 정중하면서도 분명했다.그것이 우리들과의 점심식사 약속인 것을 아는 제자들이 “저희들과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면 됩니다”하며 청와대 오찬에 참석할 것을 말씀드렸으나,Y교수님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약속은 지켜야지”라고 하셨다.천재지변이나 건강상의 이유 외에 ‘청와대 오찬’보다 더한 ‘특별한 사정’이 무엇일 수 있을까.특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일생 일대에 특별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관료주의가 전횡하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우리의 풍토에서,권력층과의 연고자로 보이면 관계와 재계에 무사통과되는 사회에서,‘청와대 식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가 지극히 초라한 자리거나 거절에 익숙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오만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6공화국 시절의 Y교수님의 자세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존심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그 무렵 나는 어느 문예지에서 주관하는 시상식 말석에서 문학상을 받은 일이 있다.수상자로서 내 문학의 이력을 점검해 보거나 심사 경위를 살피기보다 심사위원으로 거명된 원로문인들과 상이라는 화려한 명분에 취하여 행복함도 잠시,은빛 상패는 현세적이며 현시적인 내 모습의 거울이 되고 말았다.그러나 나는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부끄러운 수상경력과 함께 10여년 동안 같은 자리에 두고 바라보며,생활 속에서 수없이 선택해야 하는 ‘수용’과 ‘거부’의 저울대로 삼는다.한국은 상(賞)의 천국이다.특정단체와 문화계가 이름을 붙여 만들면 상이고,호화판 시상식이 부지기수로 이어진다.상을 둘러싼 계파간의 주권다툼이 비일비재하고,시상자와 수상자간 모종의 거래와 협약이 묵인된 채,범람하는 상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로 붐빈다.1964년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절했다.후배인 카뮈가 그 이전에 수상한 것이 표면상의 이유다.모든 작가들이 꿈꾸고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상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명예로운 일인데도 그의 자존심은 수상을 허락지 않았다.결국 사르트르 자체가 프랑스의 자존심이 되었다.‘정(情)’이라는 불가사의한 심성이 만병통치제로 활약하는 우리에게 부탁을 거절하는 일은 부덕한 행위로 여긴다.그러나 아름다운 인연도 적절한 거절이 없이는 악연의 사슬로 이어지고 만다.때로는 돈과 명예,사랑까지도 거절의 순간을 놓쳐버리면 무간지옥을 헤매게 되는 것이 인간사이기에,적절한 거절은 인간을 우아하게,인생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공식이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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