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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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복덩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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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중이던 1982년 큰맘 먹고 혼자 수개월간 유럽 배낭여행길에 올랐다. 이탈리아 바리에서 그리스 코린트로 가는 뱃길 14시간 동안 배 위엔 다양한 인종들이 어슬렁대고 각국 젊은이들은 쌍쌍이 모여 키득거렸다.그러나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다는 생각에 끔찍한 두려움으로 휩싸였다. 한국인이라곤 찾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인종으로 한 일본 여성을 찾아내 그녀 곁에 슬리핑백을 펴고 하룻밤을 보냈다.그런데 하물며 한국 아이가 부모의 버림을 받고 난생 처음 보는 노랑머리 큰 골격의 서양인 품에 안길 때의 공포감은 어떻겠는가.주한 영국 대사관 공보관으로 일하랴, 버려지는 아이들을 키우랴 수년간 바쁘게 살아 오면서도 유럽 여행 중의 그 끔찍한 심정이 문득 문득 되 살아난다.대학원생 미혼모 K씨는 대학강사인 유부남 학교선배와 사귀며 이혼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딸 둘을 낳았다.그러나 그는 이혼 후 제3의 여성에게로 가버렸다. K씨는 둘째 아이를 맡기겠다고 연락해왔다.그 아이는 엄마의 마음고생 탓에 미숙아로 태어났다고 했다.아이를 데리러 간 날 생후 11개월인 데도 몸집이 작은 토끼만한 그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했다. 연신 코를 훌쩍이며 겁에 질려 있었다.'아이를 차에 싣고 어떻게 그 먼 길을 혼자 가나' 걱정하고 있는데, K씨는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아이를 운전석 옆좌석에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같이 사라졌다.가슴이 울렁거렸다. 파랗게 질린 입술로 보면 아이는 금방이라도 심장마비로 숨질 것만 같았다.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저절로 눈물이 솟구쳤다.그러다 눈이 마주쳐 손을 뻗자 내 손을 꽉 잡았다. 그건 결코 코흘리개의 힘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완전히 이해라도 한 듯 기적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차를 몰면서도 한 손으로는 착 달라붙는 아이의 손을 쥐고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였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헨젤과 그레텔' 같은 이야기였다. 알아들을 리는 없지만 아이는 더 이상 새 눈물을 뿌리진 않았다.미혼모 Y양(18)이 5개월 된 남자아이를 안고 왔다. 부모 이혼 후 집을 뛰쳐나와 이곳저곳 전전하며 몸을 함부로 굴리다 임신했고, 아이 아빠는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 했다.어린 엄마의 눈망울엔 눈물이 마를 새 없었고 다짐이라도 하듯 '2년 후 아이를 꼭 찾아가겠다' 는 말을 되뇌었다.그러나 우린 그것이 마지막 이별임을 알았다. 아이의 헐렁한 양말을 바로 신겨주고 눈도장을 찍듯 바라보며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은 한폭의 가을 그림처럼 슬펐다.좀 오래 전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때의 일이다. 찬 바람이 쌩쌩 불던 겨울날 P씨가 협회에 전화상담을 해왔다.아내가 가출한 뒤 건설현장에서 노동을 하며 혼자 힘들게 키워온 초등학생 남매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그러나 그는 약속을 두차례나 어겼고 세번째엔 '이번엔 꼭 약속을 지키겠다' 고 했지만 3시간을 기다려도 약속장소인 서울 노원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겨우 전화통화를 하게 된 그는 싫은 소리를 하려는 나에게 울먹였다."노원역을 세 정거장 남기고 큰 아이가 '남의 집에 가기 싫어. 아빠, 차라리 우리 다함께 죽자!' 고 울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져 약속을 못지켰다" 고 했다. 그 후 네번째 약속으로 아이들을 맡겼다.몸이 매우 약한 외동딸을 둔 젊은 부부가 딸을 하나 더 키우겠다며 수양부모가 됐다. 약골인 친딸은 얼굴이 통통하고 넓적한 아빠를 전혀 닮지 않았다.그런데 수양딸은 수양아빠와 붕어빵처럼 닮은 꼴이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데려온 손녀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복덩어리' 라며 친손녀보다 더 귀여워하신단다. 요즘엔 하루가 멀다고 아들 집을 드나들며 수양손녀에게 줄 음식을 나르신다.우리 협회에 맡겨진 2백여명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그들이 눈물 보다 훨씬 더 많은 웃음을 선사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한 버려진 아이를 받아들여 행복을 주고 떠난다면, 어찌 인생이 짧고 쓸쓸하다고만 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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