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도살자의 최후
본문
고대 관습법 가운데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있다.간단히 말해 ‘눈에는 눈,이에는 이’로 표현되는 이 법은 인류 최초의 법전으로 통용되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 나타나 있거니와 고조선의 8조 금법(禁法)에도 명시돼 있다.물론 나중에 근대법 체계가 성립되면서 개인에 의한 사사로운 복수가 금지되고 살인을 반드시 ‘살인’으로 처벌하지 않게 되기는 했다.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법정신을 떠나 그 전통은 문학 등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프가 돼왔고 적어도 일부 사회에서는 여전히 살아있는 법으로서 집단적 불문율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이를테면 중세 이탈리아를 무대로 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몬태규가(家)와 캐퓰렛가(家)의 ‘피로 피를 씻는’ 가문간 복수를 작품의 배경으로 한 것처럼 이탈리아 같은 곳에서는 그같은 전통이 특히 강조됐다.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시칠리아를 본산으로 하는 범죄조직 마피아사회로 이어지고 있다.오죽하면 근친의 피의 빚,즉 무협지식 표현을 빌리면 ‘혈채(血債)’를 역시 피로 받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벤데타(vendetta)가 현대 영어사전에까지 버젓이 올라있으랴.이러한 전통은 알바니아에서도 뿌리가 깊다.노벨문학상 후보로 거의 매년 거론되는 알바니아의 거장 이스마일 카다레의 작품 ‘부서진 사월’도 관습법적인 가문간 피의 복수,곧 알바니아어로 ‘카눈(kanun)’이 얘기의 뼈대를 이룬다.그리고 그 카눈에 대해 카다레는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다른 모든 위대한 것들처럼 카눈은 좋다,나쁘다라는 판단위에 존재하는거야…그런 것을 뛰어넘는거지”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세르비아계의 ‘인종청소범’ 아르칸이 살해됐다.코소보 이전에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인들을 대상으로 대량살륙,강간,약탈을 주도해 ‘인종 도살자’‘살인기계’라는 악명을 떨쳤던 그에게 복면괴한들로부터 38발의 총탄이 퍼부어졌다.그가 알바니아인들의 전통적인 카눈에 의해 ‘처형’됐는지,또다른 피해자들에 의해 보복당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일부에서는 아르칸의 비호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이 그의 배신,혹은 인종청소 등 자신의 비리와 관련한 폭로를 두려워해 그를 제거했다는 설도 나온다.다만 그의 비명횡사 소식에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당연한 역사의 심판을받았다’며 환호했다고 한다.영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 역시 그의 죽음에 인사치레조차 하지 않았다.로빈 쿡 영국 외무장관은 그의 피살이 ‘놀랍지 않다’며 1997년 밀로셰비치와 함께 유엔 유고전범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된 그를 “재판정에 세울 기회를 놓친 것이 애석할 뿐”이라고말했다.어쩌면 아르칸 같은 인물에게는 카눈이 정당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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