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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협력자와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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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여명의 유태인들을 나치강제수용소에 보낸 프랑스의 전범 모리스 파퐁의 최후는 89세의 고령에 파리 남쪽 프렌느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 나치 괴뢰인 비시정권 고위경찰간부였던 그는 작년 4월2일 지롱드지방법원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고발을 받아 반인류범죄의 공범으로 유죄가 획정돼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고령과 건강이 나쁘다는 이유로 법정구속을 하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지난 10월21일 지롱드 고등법원의 항소심 하루 전에 파퐁은 스위스로 도망쳤다가 스위스경찰에 체포돼 프랑스로 인도됐다. 그는 항소심에서 10년 징역형이 확정됐다. 그의 구속수감은 프랑스가 55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치점령기간의 민족반역자를 계속 처단해 민주적 전통을 세우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나치협력자 청산문제를 세기말에 깔끔하게 마무리지은 점이 돋보인다.파퐁이 항소심 개정 전에 자취를 감춘 것은 항소심에서 10년형의 징역살이를 피하기 위한 야반도주였다. 지롱드경찰은 인터폴에 파퐁을 체포해 인도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지롱드고등법원은 21일 1심의 10년 징역형을 그대로 확정했다. 파퐁은 ‘로베르 드 라 로슈푸코’라는 가짜이름의 여권을 갖고 스위스의 휴양도시 그스타드의 한 호텔에 숨어있었다. 스위스에 망명을 요청하기도 전에 스위스경찰은 호텔을 기습해 파퐁을 체포했다. 그는 아무런 저항없이 수갑을 찼으나 건강상태가 매우 나쁘다고 호소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그를 베른의 한 병원에 데려가 진단을 받게 한 후 프랑스 이송에 지장이 없다는 진단서를 받아 헬기편으로 프랑스 국경에 이송, 프랑스에 신병을 인도했다. 그는 9만 프랑스 프랑(약 1천8백만원)을 소지하고 있어 사전에 망명을 준비한 것이 확인됐다.파퐁이 드골장군의 나치협력자 숙청을 피해 승승장구한 이력은 유럽의 미스테리였다. 비시정권의 경찰간부였던 그는 특히 1942·43년에 보르도경시청 부책임자로 반나치 저항단체 요원과 유태인을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유형 보내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숙청대상에 올라야 할 민족반역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해방후 랑드지방의 경시총감으로 승진해 숙청의 칼바람을 피했고, 드골이 1958년 제5공화국을 창건했을 때에는 파리경시총감이라는 실세의 자리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74년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에는 예산담당장관으로 승진했다. 나치협력자의 피묻은 손을 감추고 반나치저항운동 경력이 있어야 등용이 가능했던 전후에 그가 어떻게 출세했는지는 여러 설이 있다. “일설에는 그가 저항단체 비밀요원이라고 하지만 근거가 없다.그가 해방직후 저항단체의 추천을 받아 드골이 파견한 보르도지역 정치위원 신임을 받게 된 건 확실하다”고 필자의 저서 ≪프랑스의 대숙청≫은 한 가설을 소개했으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파퐁의 가면은 1981년 폭로전문 주간신문 <카나르 앙쉐네>가 여지없이 벗기고 말았다. 보르도의 유태인을 아우슈비치수용소에 유형하는데 공을 세운 나치협력 반역자가 바로 파퐁이라고 폭로한 것이다.1983년 희생자 유족들의 고발로 기소됐으나 재판은 16년을 끌어 이제야 10년형을 확정했다.여기서 지적할 것은 파퐁에게 55년 후 쇠고랑을 차게 한 <반인류범죄법>이라는 국제 형법의 중요성이다. 반인류범죄를 범한 자가 생존하는 한 형사소추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즉 시효를 두지 않음으로 범죄인이 죽기 전 반드시 징벌을 가할 수 있는 소급가능한 형법이라 하겠다. 1945년 8월8일 2차대전 전승국들인 미 영 불 러는 ‘살인, 집단살해, 노예상태로 전락, 유형, 고문 등 모든 시민에 대한 반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 종교 인종차별적 목적으로 행해지는 박해’를 반인류범죄로 규정하고 나치전범을 재판하기 위한 뉴렌베르 그의 <국제군사재판규정> 6조에 명문화했다. 이것이 <반인류범죄법>의 근원이다. 1946년 2월 유엔총회는 모든 국가는 반인류범죄사범을 의무적으로 체포해 당사국에 범인을 인도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1968년 11월 유엔협약에서 ‘반인류범죄를 범한 자들은 살아있는 한 형사소추를 받을 수 있는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국제법’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국제사회에 일반화시켰다. 프랑스는 1964년 <뉴렌베르그 나치전범재판소법> 제6조와 46년 유엔결의문을 근거로 자국형법에 편입시켰다. 나치협력자를 시효에 구애받지 않고 처벌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가면이 벗겨진 파퐁은 55년만에 사법처리됐다.스페인지방법원 가르송 판사에 의해 체포영장이 발부돼 영국에서 구속상태에 있는 칠레의 군사독재자 피노체트도 바로 반인류범죄의 범인으로 지목된 사실은 잘 알려진 얘기다.고문기술자 이근안씨의 공소시효 배제문제가 현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7년만 숨어지내면 시효가 만료돼 처벌할 수 없는 현행법상의 공소시효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11월9일 “‘헌법6조가 국제관습법을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으로 인정하고 있어 고문을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해 공소시효를 배제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히고 ‘이씨를 공소시효와 관계없이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는 고발장을 낸다”고 발표했다. 이 요구는 국제사회의 흐름에 호응하는 대응이며, 선진민주국에 이미 일반회된 <반인류범죄법>의 도입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유엔이 나치전범이나 나치협력자 응징차원을 넘어서 루안다와 유고내전에서 반인류범죄 사범에 대한 국제재판소를 가동하고 있어 2000년대 새로운 국제법으로 국제사회에 확산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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