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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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근교에 자리잡은 어느 기와집 솟을 대문 앞에는 해질 무렵이면 한 낯선 소년이 말없이 서 있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소년은 옆구리에 책을 끼고는 그렇게 대문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머뭇거리며 돌아가곤 했다. 그 집은 서울 장안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진사댁으로 사랑채에서는 이 진사의 가르침에 따라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소년이 그러기를 한 달이 지나던 어느날, 그 집 하인 하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것도 날마다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소년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이 진사에게 알렸다. 이 진사도 대문을 드나들면서 소년을 몇 번 본적이 있었는데, 매일 찾아오는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 진사는 직접 소년을 만나러 나갔다."너는 날마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와서 서 있다는데, 대체 무슨 일이냐"한참을 머뭇거리던 소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예, 저는 진사 어른에게 글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말씀드릴 수도 없는 처지라거 안타까운 마음에 서 있었을 분입니다.""그래 그러면 안에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자."이 진사는 사랑방으로 소년을 데리고 들어갔다."주상호라 하옵고, 나이는 열 다섯입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글방 선생을 하고 계신데 저는 열두 살에 작은 아버지의 양자로 서울에 올라왔습니다."이 진사는 주상호라는 소년이 이야기하고 있는동안 그의 얼굴이며 태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오냐,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내일부터 내 집에 와 공부하도록 해라."머리를 땋아 내리고 이 진사집 대문 앞을 날마다 찾아오던 두상호 소년. 그 소년이 바로 훗날 한글 연구의 선구자가 된 주시경 선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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