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위한 마음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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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과 구정의 사이. 아직도 시국에 대한 악담보다는 사람들끼리 복을 서로 비는덕담을 나눠서 좋을 때다.행복은 물론 성적순이 아니다. 세칭 일류대학에 다닌다 해서 모두 행복한 것도 아니고 이류 대학에 다닌다 해서, 아니 대학을 못다닌다 해서 모두 불행해지는 것도아니다.그와 마찬가지로 행복은 재산순위와도 상관없다. 억만장자라 해서 다 행복한 것도아니고 가난한 사람이라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다.그뿐만 아니라 행복은 "시국"이나 "시대"에 꼭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 좋은세상을 만났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불운의 시대를 산다고 해서 별수없이 불행해야만 된다는 법도 없다.나치스의 "인공 지옥" 아우슈비츠 유태인수용소에서 살아나온 빈의 정신의학자빅토르 프랑클 박사는 자기의 일생동안 아우슈비츠에서처럼 하루하루의 삶을 "인텐시브"(강렬하게)하게 산 일은 없었다고 회고한 얘기도 들었다.외부 요인, 물질적 여건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이 행복의 절대적인 전제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복은 환경규정적이라기보다는마음가짐에 의해서 좌우되는, 뛰어난 의미에서 "마음의 기술"이 아닌가 여겨진다는 것이다.아침에 잠에서 깨면 대우의 김우중회장은 눈에 안약부터 넣는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일이 있다. 눈을 맑게 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위하여. 이부자리에서일어나면 요즈음 나는 아침마다 조수미가 부르는 우리 가곡을 몇곡 CD로 듣는다. 그러면 조건반사처럼 틀림없이 눈물이 흘러 눈이 맑아진다.조수미가 부르는 "수선화"며 "산유화", "고향"이며 "그리운 금강산"을 듣고 눈물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영문은 요즈음 젊은이들이 이해못할것이다. 조수미조차도 이해못할 것이다.올해로 광복 50년이니 오늘의 한국을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의 대부분은 이미 망국의 체험을 모르는 세대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조수미가 우리말로 우리 가요를 저처럼 아름답게 불러서 우리음악을 시쳇말로 "세계화"하고 있다는 사실앞에서 지난날 우리 말도 지껄이지 못하고 우리 노래도 부르지 못하고 "조선인"은 후진 사람이라고만 모멸 받던 세대가 오늘 느끼는 벅찬 감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엇이 참으로 좋다는 것을 알게되거나 그의 진가를 깨닫게 되는 것은 그것을 잃어보았을 때다. 나라도 그렇고, 나라말도 그렇다.그렇게 따진다면 망국 그 자체는 매우 불행한 겨레의 비운이라 하겠지만 망국의체험을 했다는 것은 그를 체험한 사람들에겐 나라가 있다는 것의 고마움을 여느 다른 사람들이 맛볼 수 없을만큼 벅차게 맛보게 해주는 행복을 안겨준다고도 할 수 있다.가령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했다는 것이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겐 단순히 또 하나의 김메달을 보태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 조선소년들의 영웅 손기정선수가 가슴에 히노마루(일본국장)를 달고 베를린 마라톤의 월계관을 써야했던 사진을 본 그 "통석"의 추억을 간직한 세대에게는 황영조의 금메달은 단순한 여느 금메달은 아닌 것이다. 그점에서도불행한 "상실의 체험"을 가진 사람이 때로는 그러한 불행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욱 행복할 수는 있다.요컨대 사람의 행복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다는 얘기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야되고 어느 시대나 행복해야 된다. 보다 행복한 21세기를 위해서 20세기를 사는 사람에게는 불행을 감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역사학자 레오폴트 랑케의 말과 같이"모든 시대는 저마다 신앞에 직접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일을 위한 전단계나 준비단계가 아니라 오늘은 오늘로서 더할나위 없는 것, 절대자 앞에 직접하고 있는 것이다.아니,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맑은 하늘 밑에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장교가은행강도질을 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도대체 행복을 논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그렇다고 강변하기는 어렵다.그러나 돌이켜본다면 군인이 군영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총을 들고 밖으로 나와권력을 장악해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군인을 어떻게 변질시킬 수도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그 불행한 장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아닐까. 한국의 근대화 산업화과정에서 바로 일부 "성공적"인 군의 사회참여때문에 군의 참된 위상을 우리 사회가 오해하고 있던 것을 은행에 뛰어든 그 장교는최소비용으로 우리 모두의 눈을 맑게해서 그야말로 일격에 깨닫게 해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것도 나는 우리의 복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새해를 복스럽게 시작하기위해서..(연세대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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