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바퀴자국
본문
도움말: 우리는 인생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억될만한 사랑의 행동은 없었는가 없다면 지금부터 해볼 생각은 없는가 또 우리의 기억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기억들이 새겨져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가 아니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원망의 안개로 가득차 있는가버스가 지나갔다. 내 삶에도 많은 버스가 지나갔다. 특히나 '사랑'이라는 버스가. 문득 나는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그리스 민요 '기차는 8시에 떠나네'가 생각났다. 그 슬프디 슬픈 선율을 기억하는가.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이제 밤이 깊어도 당신은 비밀을 품고 오지 못하네. 가슴속에 아픔을 새긴 채 안개 속에 나는 앉아만 있네." 그래, 돌이켜보면 사랑이란 바로 저 버스와 같은 것이었다. 뿌연 먼지만 일으키고 아득히 멀어져가는 완행버스. 나만 덜렁 정류장에 내려놓은 채 멀리 사라지는 버스의 꽁무니를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이었던지. 함께 버스를 타고 영원히 갈 수 없다는 그 사실이 나한테는 얼마나 큰 절망이었던지. 내 가슴에 난 바퀴자국.쑥스럽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 유난히 춥고 유난히 고달팠던 그 시절,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지 한 달이 갓 넘었을 때였다.저녁업무를 맡은 나는 그날도 상급부대의 문서를 수령하기 위해 경기도 운천에서 철원으로 가는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목적지에 다다라 내리려고 할 때쯤 나는 '전령증'을 부대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그 증이 없으면 꼼짝없이 차비를 내야 하는데 마침 내 주머니에는 잔돈만 달랑 몇 푼 있을 뿐이었다.당혹스러웠지만 어쩔 것인가. 그거라도 내려고 내가 손을 내밀었을 때 낯이 뜨거워 안내양의 얼굴도 외면하고 있었는데, 안내양 아가씨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도로 잔돈을 돌려주며 내 손을 꽉 움켜잡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범한 아가씨였다. 차비를 못냈다는 부끄러움보다 내 손을 한참 동안 잡고 있는 그 아가씨의 뜻밖의행동 때문에 내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버스에서 내린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떠나가는 버스를 쳐다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 나는 또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차창에 기대 선 채로 내게 조용히 손을 흔들던 것을.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호의가 고마워서가 아니라 나에겐 진정 그녀가 사랑스러웠던 거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버스를 쫓아가 그녀를 꽉 부둥켜안고 싶을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한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을 오래 잊지 못했기에, 아니 잊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었기에. 틈만 나면 정류장에서 그 버스를 기다리던 나는, 기약도 없는 기다림이었지만 소중한 것을 위한 희생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아름답고도 애틋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나는, 그렇게 그녀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내 가슴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던 삼영버스 2390번. 하지만 끝내 그 버스는 다시 오지 않았음에랴. 다른 버스 안내양으로부터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는 바로 그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났다고 했다.사고가 났고, 그 자리에서 그녀가 즉사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그때는 정말 말이 나오지 않았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스르고 올려다보니 방금 나를 내려놓고 간 버스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사랑은 그런 거다. 그렇게 지나가는 거다. 우리 삶에 깊은 생채기만 남긴 채.시인 이정하 작은 이야기에서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