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아인이 살인범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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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 살인범의 변호를 맡았다.살인의 동기를 밝히는데 여간 애를 먹지 않았다.사건은 간단했다.95년 12월 어느날 서울에서 가까운 읍에 살던 K가 그 마을 청년을 살해했다.하지만 살해동기를 알수 없었다.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K 역시 수화도 못배웠고 한글도 모르는 농아인이었기 때문이다.나는 그와 함께 살던 동생을 만났다.곱슬머리를 한 작달만한 청년이었다.내가 악수를 하기위해 손을 내밀자 동생은 어색한 태도로 왼쪽 손을 내밀었다.오른손은 주머니에 그대로 찔러 넣은 채로.그제서야 나는 동생이 오른팔을 사고로 잃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제가 원래 병신은 아니구요.몇년전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가로수에 부딪쳐 이렇게 팔이 없어졌어요”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살아온 역정을 얘기하기 시작했다.그들 형제는 손바닥만한 땅조차 물려받지 못한 농사꾼의 아들이었다.살인범이 된 형은 초등학교 시절 동네 강가에서 놀다 귀에 물이 들어가 중이염이 생겼고 점차 듣지도 못하게 되었다.동생이 형의 입과 귀가 되었다.이번에는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팔을 잃었다.팔 하나가 그렇게 귀중한 건지를 정말 몰랐다.품팔이를 하는데도 남들이 한시간이면 할 일을 세시간도 넘게 걸렸다.그렇다고 남들이 사정을 봐서 품삯을 쳐주는 것도 아니었다.선천적 장애인이었다면 체념하고 살았을텐데 후천적 불행은 마음에도 큰 상처를 주었다.냉정해지는 주위의 눈길을 피해 형제는 남들과 떨어져 살았다.가평 근처 백여평의 밭에 부추를 심어 서울에 내다 팔면서 살았다.그러던 어느날이었다.형이 서울로 가기위해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길이었다.그 마을에 사는 청년이 형을 보더니 히죽히죽 웃으면서 팔다리를 휘적거리는 것이었다.순간 형은 분노가 솟구쳤다.벌써 몇년째 그 청년은 병신흉내를 내면서 자신을 따라다니며 놀렸다.형은 손짓발짓으로 제발 그러지 말라고 했다.그러나 그 청년은 그럴수록 재미있다는듯 막무가내로 흉내를 내면서 낄낄 웃었다.이성을 잃은 형은 근처의 농가로 뛰어들어가 툇마루에 놓여있던 장도리를 들고나와 청년의 머리통을 내려쳤다.청년은 그 자리에서 푹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숨진 것이다.형은 경찰에게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의사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경찰에서는 정신박약자가 혼자 보던 비디오의 살인을 흉내낸 범행이라고 추정하기도 했다.놀라운 사실은 법정에서 일어났다.죽은 청년이 뇌성마비의 지체장애인이 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결국 그 청년은 형을 놀린 것이 아니었다.뇌성마비 환자 특유의 몸짓에 불과했던 것이다.형의 열등감과 오해가 그나마 편치 못했던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만든 것이다.“우리 형제가 무슨 운명을 타고 태어났는지 모르겠어요.정말 산다는게 힘들어요…”동생의 하소연이었다.나는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 없었다.했다해도 형식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다행히 동생은 어떻게 살지를 알고 있었다.“저는 그래도 열심히 살래요.오토바이사고가 났을 때 시체가 돼서 거적떼기까지 뒤집어 썼던 놈인데…”인생은 괴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다.그래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해도 축복이 아닐까./엄상익(변호사·법무법인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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