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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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날을 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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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유대 민족은 그 나라에서 대탈출을 감행했던 날을 무교절(無酵節)로 기념하여 딱딱한 빵과 쓴 나물을 씹는다.수치스러웠던 과거를 잊지 말고 자손 대대에 전하여 교훈으로 삼자는 뜻이다.유대인들이 강인한 것은 영광의 날보다 수치의 날을 더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는다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지금도 이스라엘은 나치에게 학살당한 자들의 금이빨 덩어리와 안경,그들의 기름으로 만든 비누 등을 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이스라엘의 모든 아이에게 보여준다.우리나라에도 부끄러운 날이 있다.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의 총리대신 이완용이 일본국 데라우치 통감 앞에서 한국 황제는 일본국 황제폐하께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 영구하게 양여한다는 굴욕적인 합방조약에 서명했다.이른바 ‘경술국치’ 사건이다.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아프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또 하나 있다.지난 97년 12월3일 한국의 임창열 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이 요구한 자본시장의 개방,금융기관 정리 등을 수락하는 구제금융신청 의향서에 서명했다.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 총재는 대선을 앞둔 세명의 대통령 후보에게도 이행조건 준수 각서를 요구하여 이에 서명하거나 공한을 통해 합의 의사를 다짐받았다.언론들은 이를 ‘경제신탁통치’ 또는 ‘경제식민’이라는 자조섞인 말로 우리의 통분함을 표현했다.경술국치 때에는 그래도 우리에게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숙명이 있었다.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이에 산업혁명이 일어나 신무기로 무장한 강대국들이 몰려들어오는 틈바구니에서 우왕좌왕 하다가 일본의 위협에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그러나 97년은 달랐다.교역규모가 세계 11위에 올라섰다고 해서 우리는 당시 병당 150만원짜리 양주를 마셨고 30만원씩 팁을 뿌리는 나라였으며 총규모가 1조원에 이르는 세계 제일의 모피 소비국이었다.그리고 3년이 지났다.정부는 외화보유액이 늘었고 실업률도 줄고 경제 지표가 회복되어 IMF를 졸업했다고 말하지만 그 날 서명한 이행각서대로 우리가 피땀 흘려 일궈 놓은 알짜 기업들의 주식은 외국인의 손에 헐값으로 넘어가 버렸다.자동차 회사들이 외국 회사에 매각되고 있으며 핵심 부품업체까지도 외국 재벌들에 인수당했다.우리 은행들은 팔리거나 정리되고 재벌들은 속절없이 해체되고 있다.하루 아침에 못난 조상이 되어버린 우리가 그래도 우리 자손들을 더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딱딱한 빵과 쓴 나물을 씹으며 그 날의 수치를 기억하도록 단단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예레미야애가 5:1∼2)/김성일<한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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