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과 기독교
본문
독립선언문은 3·1운동의 행동강령을 무저항 비폭력으로 강하게 표방하였다. 또한 민족과 인류를 향한 평화와 사랑의 이념을 드러내고 있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 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 . ’로 이어지는 선언문의 마지막 부분은 마치 성경을 읽는 것 같다. 만일 3·1운동이 무력투쟁이 되었다면 세계에 미치는 호소력이나 후세에 남기는 정신적 영향은 매우 축소되었을 것이다.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기독교 신자가 되지는 않고 말았으나 한국기독시보와의 인터뷰에서(1956) 몇가지 점을 확실히 역사 속에 남겼다. 첫째 자기가 전덕기 목사(상동감리교회)를 가장 존경하여 그 댁 뒷방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성경을 읽고 들으며 기독교의 사랑 정신을 받은 점, 둘째 자유니 독립이니 하는 선언문의 용어들과 특히 선언문에 반영된 비폭력 무저항 사상이 기독교의 영향이라는 점이다.독립선언문에 기독교사상이 들어간 것뿐이 아니라 거족적인 만세운동이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무저항 비폭력으로 일관한 것은 당시 조선의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의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기미년은 시대적으로 러시아의 톨스토이(1823-1910) 인도의 간디(1869-1948) 등 무저항주의의 영향이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철저한 사랑의 사도 길선주 목사(1869-1935)와 이상재 선생(1850-1927)의 무저항주의 영향이 크다. 길선주 목사는 당시 유명한 부흥사로 가는 곳마다 예수의 사랑을 전했으며 취조하는 일본 관헌에게도 털깎기는 양 같이 겸허하게 사랑의 증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상재 선생도 사방에서 무력항쟁의 압력이 있었으나 끝까지 만세운동을 비폭력으로 이끌었다.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이 16명이다. 1919년 3월과 4월 사이에 전국에서 만세를 부르고 조선독립을 외치는 집회가 1214회 있었는데 그 중 괄목할만한 큰 운동은 320곳이었다. 그 중에서 교회가 단독적으로 주도한 운동이 78지역,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동하여 일으킨 운동이 42지역이다. 기독교인이 체포된 수가 3373명이며 목사는 수 없이 체포되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조선 인구의 1. 3%였다. 지금 남한의 예수 믿는 사람이 인구의 24%에 이르고 있으니 비교도 안되는 소수였으나 민족을 영도하는 위치에 분명히 서있었고 존경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전국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일치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과 인간의 자유를 위하여 일어나 고문당하고 총에 맞으며 헌신하였다. 한국교회 발전의 뿌리에는 이런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피와 눈물과 기도가 깔려있다. 한국역사는 수난의 세월과 더불어 싸워온 기독교인들의 희생과 헌신을 묵과해서는 안된다./최효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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