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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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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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면 진료실로 나와 하루 6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인 일이 거듭됐다.어린 환자들의 울음 속에 파묻혀 하루를 꼬박 보내다 보니 김원장은 오래전부터 보청기 신세를 지고 있다.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헌신에 지금 포항에 사는 40대이상 세대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이고 3대가 내리 그의 진료를 받은 가정도 드물지 않다.선린병원은 고아와 환자들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포항 인근지역의 가난한 환자들에게 인술(仁術)의 빛을 주는 병원이 됐다.그러나 김원장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유일하게 함께 월남한 아들이 서울에서 입시공부를 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맬 때 김원장은 사고소식을 듣고도 “내 아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진료실을 지켰고 끝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이같은 아픔 탓인지 김원장은 유독 나이 어린 환자들을 보면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히곤 한다.김원장은 경북 제일의 종합병원 원장이면서도 병원에서 준 관사 1동과 월급으로 생활한다.자가용보다는 버스를 즐겨 타는 그는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한 사회봉사상을 비롯 보사부장관상,예수교장로회 총회상,국민포장, 대통령포상,월남이상재상,포항시민상 등 숱한 상을 수상했지만 아직도 의료현장의 ‘최전방’인 병원 진료실을 떠나지 않고 있다.이런 김원장에게는 몇해전부터 묘한 애칭이 따라다닌다.환자들과 병원 직원들 모두 그를 부를 때 ‘원장님’이라는 딱딱한 직함 대신 ‘할아버지’ 또는 ‘우리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대외적인 명성이나 자리엔 전혀 욕심 없이 의사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는 그를 존경의 뜻으로 부르는 이 애칭에는 선린병원 현관에 걸린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와 함께 김원장의 인생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한편 김원장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청빈한 의사를 키우는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83년 포항간호전문대를 인수해 선린대학을 세우고 의료인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그 첫번째 발걸음이였다.최근에는 40여년간 몸담아온 선린병원을 한동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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