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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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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천국에 가기란 멀고도 험했다.6일 낮 여의도에서 경기도 고양 일산신도시를 거쳐 봉일천 방향으로 10㎞가량 가다가 법원리를 지나 광탄3거리,군부대의 비포장도로를 굽이굽이 지나 2시간여만에 간신히 도달한 곳.장애인 신앙공동체인 작은 천국 ‘주보라의 집’(원장 김광식 목사)으로 가는 길은 이만큼 험했다.사진기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니까 ‘주보라의 집’에서는 잠시 소동이 벌어졌다.“광철아 너 국민일보에 얼굴 나갈 거야.깨끗이 씻어야지.얼굴에 묻은 코딱지는 뭐니”“도균이하고 혜민이도 데리고 와라” 김목사의 아내인 이지혜 사모(41)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차디찬 공기를 갈랐다.기념사진에 너도 나도 참여하려고 하다가 인원이 제한돼 발걸음을 돌린 원생들의 얼굴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세살짜리 은지, 휠체어에 의지한 채 온몸을 뒤틀고 있는 광철이,31세 정신지체자 효실씨 등이 사진을 찍으러 모였다.“나중에 햄버거 사줄게”하는 이사모의 말에 힘든 웃음보를 터뜨린 원생들은 이 순간만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했다.30여명의 중증 장애인을 식구로 맞아들인 ‘주보라의 집’은 지난 89년 11월 서울 보문동4가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인이 된 김목사는 함께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전도사로부터 “장애인 일을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고 친지의 도움을 받아 경증 장애인 작업공동체를 세운 것이다.하지만 함께 하자던 전도사는 도중에 일을 접는 바람에 김목사는 혼자가 됐다.90년대 들어서 장애인 고용촉진공단을 통해 돌봐준 장애인 8명이 모두 취직하자 김목사는 재가장애인들에게 선교하는 방식을 새롭게 택했다.그런데 이곳저곳을 방문하면서 김목사는 오갈데 없는 중증 장애인들의 비참한 실상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대형교회에 안주하면서 장애인 대상 특수 목회를 꿈꾸던 김목사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네 십자가인데 남에게 떠맡길 수 있느냐”는 음성을 듣고 94년 서울 미아동에 중증 장애인의 보금자리인 ‘주보라의 집’을 세웠다.하지만 장애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김목사 부부의 가슴을 난도질했다.무려 200여곳에서 장애인 시설 설치에 대해 반대한 것이다.기나긴 설득 끝에 가까스로 한 집에 월세로 입주했지만 화장실을 고치는 것까지 뭐라 하는 주인의 타박은 계속 이어졌다.이런 와중에서도 김목사의 헌신적 사랑 덕분에 장애인에 대한 이웃의 편견을 없애고 잘 지냈다.3년여가 지난 97년 어느날 월세를 한달 못냈다며 주인이 방을 비워줄 것을 요구해 또다시 서러운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교회와 친지의 도움으로 지금의 파주시 법원읍 오현1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이곳에 온 장애인들은 다른 사회복지단체에서도 받기 힘든 중증 장애인이고 가족과 이웃이 버린 가슴아픈 형제,자매들이다.김목사는 이들을 “부모의 가슴속에서 잊혀진 버려진 아이들”이라고 표현한다.정신지체인 B양은 자신을 한번도 찾아보지 않은 부모를 지난 7월 김목사 부부의 손에 이끌려 찾았으나 “왜 이렇게 키가 작느냐.주보라에서 못먹고 자란 것이 아니냐”는 불만을 들어야 했다.여행사를 운영하는 K군과 제주도에서 사업을 하는 L양의 아버지는 한번 자식을 만나보라는 김목사의 권고를 애써 무시했다.김목사는 가슴속에 응어리가 진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집을 가장 좋은 안식처로 만들기 위해 깔끔하게 꾸몄다.이로 인해 주변에서 ‘장애인 공간치고 너무 좋다.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도 나올 정도였다.목욕도 직접 시키고 이들과 하루일과를 함께 했다.김목사 부부의 헌신적 사랑에 원생들도 마음의 문을 어렵게 열었다.오전 9시의 큐티와 오후 3시의 찬양은 어느덧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됐다.예배를 드리는 동안에 불편한 몸 때문에 기도에 동참하지 않은 정신지체인 미애로 인해 가슴앓이를 했던 김목사는 어느날 밤 미애가 밤에 혼자 손과 발을 마주치면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고 기도하기도 했다.김목사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외부의 비뚤어진 시선과 행동이다.이곳에 가끔 후원하러 온 교회 성도들과 학생들은 몸을 심하게 비트는 원생을 보고 도망가기도 하고 소식지에 자신의 이름이 실리지 않았다고 항의하기도 한다.장애인과 병자를 형제처럼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보지 못하는 무지개빛 겉치레의 신앙인들에게 절망도 했다.그래서 김목사는 한국 교회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것만 요구했다.“교회들이 이민족 선교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소외된 자들의 공동체를 돌아보는 마음을 갖고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031-959-6114).□ 김광식 목사 부부는주보라의 집 원장 김광식 목사는 조선시대 이름 높은 시인 윤선도의 귀양지로 유명한 전남 보길도에서 1960년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김목사는 3세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못쓰게 됐다.그러나 부모는 장남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아무 차별없는 따뜻한 손길로 김목사를 대했다.김목사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낙천적인 사고를 지니게 된 것은 어릴 적 이같은 따뜻한 가정환경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한다.김목사가 신앙을 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때 마을 초등학교 선생님이 군대를 마치고 돌아와 세운 보길 동부교회에 다니면서부터다.장애인이란 이유로 친구가 없었던 김목사는 의지할 곳을 찾았고 교회를 선택,이는 곧 일생의 보금자리로 자리잡았다.초등학교만 마친 김목사는 지난 77년 상경,경기 광명의 장애인 재활원에서 일했다.84년 어느날 우연히 영세민 자격으로 서울의 삼육재활병원에서 다리 교정수술을 받게 됐다.그는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면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기도했고 이는 몇년후 실현됐다.김목사는 자신의 평생 반려자인 이지혜 사모를 장애인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자신의 휠체어를 밀어준 이사모는 결국 영원히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이가 됐다.이들의 헌신과 장애인 사랑은 외부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취재도중 찾아온 경기도청 관계자들은 파주에서 가장 심한 중증 장애인들을 보살피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항상 웃는다며 김목사 부부를 치켜세웠다.“현재 빚이 1억원 가까이 있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이 해결해주실 것이고 우리는 장애아들과 소중한 인생을 가꾸는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김목사 부부는 이렇게 말하며 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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