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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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8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한국YMCA.4백여명의 청년들이 한국YMCA강당을 가득 메웠다.20대의 사각모를 쓴 학생들은 모두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었다.건물외벽에는 `학우회 임원선거를 위한 총회'라고 쓴 쪽지가 붙어 있었다.그러나 이는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한 것이고 이날의 모임은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알리려는 `조선독립청년단'의 독립선언문 낭독대회였다.강당의 단상뒤에는 이미 독립선언서가 씌어진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개회사가 있은 다음 윤창석의 기도가 막 끝날 무렵,최팔용이 긴급동의를 외치며 단상으로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 대회'를 선언하고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학생들은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채택하고 환성을 질렀다.많은 유학생들이 모여들자 회관주변을 서성대고 있던 30~40명의 일본경찰은 당황해 강당으로 뛰어들며 해산을 명령했다.수십명의 주모 학생이 검거 되고 대표자 11명 가운데 9명이 감옥에 수감됐다.이날 대회가 치러진 한국YMCA와 윤창석의 기도는 매우 큰 의미를 던져준다.그것은 참석자들이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이고 민족의 독립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도쿄 한국YMCA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시설이었으며 2·8독립선언낭독을 뒤에서 지원한 한국YMCA의 총무 백남훈은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다.3·1운동의 도화선이 된 도쿄 2·8독립선언에 참가한 학생들은 한국에서 교회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학생들이었다.기도를 한 윤창석을 비롯 백관수 김도연 김철수 서춘 김상덕 이종근 송계백 등 감옥에 수감된 학생들은 나중에 허가를 얻어 기도를 드릴 정도로 믿음과 기독교 신앙이 투철한 학생들이 었다.기독교는 우리나라에 전파된지 10여년이 지나면서 토착화에 성공한다.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곳곳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목사와 기독인들이었다.칼날 앞에 선 민족의 운명,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운명을 굳건한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 기독인들이 앞장서면서 기독교는 민족의 중흥을 가져올 희망의 종교요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민족의 운명을 이스라엘민족과 동일한 상황으로 인식했다.4백여년 동안의 노예생활에서 풀려나 애굽을 탈출하고 가나안으로 들어가 독립국가를 세우는 이스라엘민족의 운명을 우리나라의 형편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고 있었다.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성취시키려 했다.나라를 잃고 좌절감에 빠진 국민들에게 기독교 복음은 희망 그 자체였다.2·8독립선언서가 낭독되기 1개월전,조국 서울에서는 조선청년독립단이 파견한 송계백이 송진우를 만나고 있었다.그는 천도교와 기독교 인사들을 만나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전하고 독립선언서를 보여줬다.이것이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해 서울에서 3·1운동이 계획된다.동시에 상하이로 파견된 이광수는 영문으로 된 독립선언문을 미국 영국 프랑스에 타전하고 2월 8~9일 양일간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영자지에 이를 실음으로써 전세계에 한국의독립선언을 알리게 된다.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의 점화과정에서 기독교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 한다.평양의 선우혁과 서울의 이갑성도 기독교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이것이 이승훈에 의해 천도교,불교와 합류된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48인 가운데 24인이 기독인이었다.1919년 당시 한국의 인구는 1천7백만명.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30여만명에 불과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인이 었으며 3·1운동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30%가 기독인이었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당시 선지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3·1운동이 일어나기 하루전 탑골공원 옆에 있던 승동교회의 청년들은 교회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등사기로 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그리고 3월1일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눠줬다.독립선언문에 나타난 사상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초월한 보편적인 가치관과 인류공존을 지향하는 비폭력적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후에 독립선언의 기초이념이 기독교사상이었다는 것을 증언했다.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이 신앙 안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곳곳에서 찾을수 있다.기독교대표 16인 가운데 감리교 목사였던 신석구는 선언서에 서명하도록 권유를 받았을 때 20여일을 새벽기도를 한뒤 서명했다.그는 2월27일 새벽기도를 하는데 “4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듣고 서명했다.신목사는 감리교 목사로는 드물게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로도 유명하다.3·1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독교대표들은 모두 기도의 역군이자 `한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이승훈은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된뒤 공판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의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겠느냐”고 했다.신흥식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니 참고 있을려고 했는데 일본 정부의 비인도적 태도와 총독정치의 핍박을 참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이스라엘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교회는 3·1만세운동이 한창일때 `독립단통고문'이란 것을 뿌린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매일 3시에 기도하고 주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는다.월요일=이사야 10장(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화요일=예레미야12장(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수요일=신명기28장(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목요일=야고보서 5장(고난당하는 기독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금요일=이사야59 장(죄지은 백성이 회개할때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예언),토요일=로마서8장(성령이 주시는 생명,지금의 고난은 미래의 영광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숙대 이만열교수는 “기독교의 항일독립운동은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신앙운동이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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