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쾌척 최병순 할머니
본문
000년 6월 14일"언제 하직할 지 모르는 세상에서 살았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었는데 이제 그 소망이 이뤄졌습니다."1년전 평생 모은 재산 10억원을 고려대에 장학금으로 기증하면서 이같이 소감을 밝혔던 최병순(崔丙順.85)할머니가 지난 1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혈혈단신이라 아무도 저승길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가난한 고학생들을 위해 안쓰고 안입고 모은 전재산을 아낌없이 바친 할머니의 삶은 세인들의옷깃을 저절로 여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빈소를 찾은 김정배(金貞培)고려대 총장은 "할머니의 숭고한 정신으로인해 불우한 학생들이 배움의 기회를 얻어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고 있다" 며 고인의 넋을 추모했다.崔할머니가 마지막까지 기거하던 서울 서초구 방배본동 동장 이재훈(李在勳.54)씨는 "할니가 사시던 방배동 삼호아파트 앞 도로를 '향학(向學)로' 나 '배움의 길' 로 부르도록 서초구청에 청원할 생각" 이라고 말했다.일제시대, 광복 이후 혼란기, 한국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을 홀몸으로 견뎌냈던 할머니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고초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1915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崔할머니는 5살 때 온몸에 종기가 돋는 괴질을 앓아 14년간 병마(病魔)와 싸우면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19세 때 결혼한 남편은 노름.술을 일삼은 사람이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할머니는 35년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왔다.이후 재봉일을 하면서 억척스레 돈을 모아 만주행 열차를 탔다가, 모은 돈을 만주에서 탕진했다.중.일전쟁을 피해 다시 서울로 돌아온 할머니는 그뒤 식모살이, 바느질, 품팔이, 야채행상 등을 해 번 돈으로 43년쯤 종로구 인사동에 하숙집을 시작했다.그럭저럭 다시 돈도 모으고 세상사에 재미를 붙이면서 살아가나 했으나불행은 또다시 닥쳐왔다.해방전후 좌우의 이념대립이 극심했던 48년쯤 할머니의 집 하숙생이 좌익활동을 한 것으로 밝혀지는 바람에 경찰이 할머니까지 고정간첩으로 몰아 40여일간 모진 고문을 했다.한국전쟁이 끝난 뒤엔 부역 혐의자로 몰려 다시 10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했다.수형생활 중 "죄가 있다면 죽어야지요. 하지만 죄가 없다면 살아나가게 해주세요" 라고 간절히 기도한 탓인지 60년 출소의 기회를 얻은 崔할머니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식모살이, 암표장사에 창녀촌에서 빨래까지 하면서 돈을 모았다.조금씩 모은 돈으로 고향에 논과 밭을 샀고 저축액도 늘어났다. 하지만언제나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은 뭔가 허전했다. 특히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명절이나 생일날이 더욱 그랬다.고인이 평소 양아들처럼 의지했던 이웃 장석은(張錫殷.49.코래컴사장)씨는 "할머니는 평생 옷도 한벌 사지 않고 변변한 반찬도 없이 물에 말아식사를 하면서 억척스레 돈을 모아 말년에는 통장을 80개나 갖고 계셨다" 며 "하지만 명절 때 가실 데가 없어 우리 집에 오서 펑펑 울고 가시곤 했다" 고 애통해 했다.이때 할머니가 생각한 것이 후학들의 교육이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간 자신의 삶을 젊은 세대들이 되풀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것이다.할머니는 "내 돈으로 공부한 학생들이 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된다면 여한이 없다" 며 일생모은 전 재산을 고려대에 쾌척, '나만 잘 살면 그만' 이라는 탐욕한 세태에 삶의 참된 가치를 일깨웠다.張씨는 "할머니의 생에서 새겨둬야할 것은 장학금의 과다보다도 홀몸으로 일생을 굿굿이 버텨온 '굳은 '의지와 사랑" 이라고 강조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