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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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웃어 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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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이민 갔을 때의 일이다.아침 산책을 하는데,저 멀리서 백인 아가씨가 걸어오고 있었다.나는 생면부지의 미국 아가씨를 아는 체 할 이유가 없어 눈을 내리 깔고 지나쳤다. 그런데 그 기다란 다리의 백인 아가씨가 "하이!"하면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밝은 미소를 보내면서 말이다.나는 일방적인 기습을 당하고 얼떨결에 "하이!"하고 같은 종류의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러나 때는 벌써 늦었다. 그 긴 다리의 백인 아가씨는 이미 지나간 뒤였고, 내 표정은 마치 된장찌개를 먹다가 고깃덩어린 줄 알고 씹었는데, 된장 덩어리를 씹었을 때나 지을 그 어정쩡한 표정을 하고 말았다.책을 보니 미소도 훈련이 필요하단다. 그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책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미소를 지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가르침을 따라 거울을 볼 때마다 씨익 미소를 짓는 연습을 하곤 했다.효과가 있었다. 나는 거울을 대하는 시간이 남들보다 길었던 까닭이다. 나는 수염이 많아서 면도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 습관이 된 것도 장점이었다.'차라리 이 수염이 머리로 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필요한 데는 빠지고 필요 없는 데는 이렇듯 무성해서 나를 괴롭힐 게 뭔가' 거울을 보면서 그런 한탄을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나는 드디어 그 원인을 발견했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물구나무를 잘 섰다. 그때부터 머리카락이 방향 착오를 일으켰던 것이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는 턱을 머리로 알고 그리로 솟아난 것이 틀림없다.어쨌든 나는 열심히 거울을 볼 때마다 미소 짓는 훈련을 했고, 그렇게 미국 사람들 속에서 적응할 수 있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 표정들이 너무 굳어 있었다. 배기가스만 공해가 아니라, 찡그린 얼굴들이야말로 무서운 공해였다.도착한 다음날,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탄 다음 층에서 젊은 아가씨가 탔다. 나는 무심결에 "하이!"하며 미소를 띄웠다. 그러자 그 아가씨의 눈이 얼음판에 넘어지는 황소 눈처럼 커지더니 돌아서 벽을 짚고 후들후들 떠는 것이 아닌가!그러더니 일층에 닿자마자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나는 큰 무안을 당했다. 아마도 그 아가씨는 늙은 치한이 추파를 던진 것으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묘한 버릇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서로 안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면을 한 채 눈들을 한곳으로 집중시킨다. 엘리베이터 층수를 나타내는 불을 따라 마치 군대 사열을 하듯 통일되게 눈동자들만 소리나게 움직인다. 그렇게 상자에 갇힌 인형처럼 두눈만 굴리고 있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앞을 다투어 뛰어나간다. 그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엘리베이터 문화였다.나는 그 다음날부터 작전을 바꾸었다. 아파트엔 젊은 부부들이 꽤 많았다. 젊은 내외가 네댓 살쯤 되는 아들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는 먼저 그 아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아이는 금방 나를 보고 웃어 보였다. 아이들은 내가 머리숱이 없으니까, 제 또래인 줄 아는 모양이다."몇 살" 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대부분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그러면 엄마가 보다 못해 "아니, 다섯 살이라고 말씀 드려야지"하고 거들었다. 거기까지 진행되면 반은 성공이다.내가 "이름은"하고 물으면, 아이들은 "진…승, 진…승"하며 수줍어서 기어들어 가는 모기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한다. 그러자 이번엔 아빠가 나섰다."진성이라고 말씀을 드려야지.""아, 진성이라… 진실하고 성실하라고 아빠가 이름을 지었구나."그렇게 내가 답을 하자, 젊은 내외의 입은 귀까지 찢어졌다."아니, 어떻게 우리 애 이름을 그대로 맞추십니까"그야 뭐 뻔하지 않은가 진성이라 하면, 진실하고 성실하란 게 기본 아닌가 뭐 이름을 나쁜 뜻으로 짓는 부모가 있겠는가 나는 그 젊은 부부의 놀란 얼굴을 못 본 체하며, 그 아이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이 녀석 잘 키우세요. 귀하며 부리부리한 눈하며 앞으로 큰 인물이 되겠어요."그렇게 덧붙였다. 그 말에 젊은 내외는 몸둘 바를 몰라 했다. 그렇다고 2,30년 뒤에 큰 인물 안됐다고 나에게 따질 것도 아니니 걱정할 일도 없다. 그러니 칭찬에 인색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그런 방법으로 나는 미소 하나로 아파트 입주자들을 모두 다 정복했다. 그리고는 그 여세를 몰아 나의 미소 운동을 범국민 운동으로 펼쳐 나갈 계획을 세웠다.그 기회가 용케도 '코미디 전망대'로 이어진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미소를 잃지 않는 법이다. 난 그것을 확신하고 있다. 늘 웃으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인상도 좋을 뿐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평안을 준다. 《김경태 장로의 '웃으며 살자구요'라는 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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