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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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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줍기


 


 


 


 


Not In Vain 헛되지 않습니다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 고린도전서 15:58


나는 2000년 9월에 오하이오에 있는 한 작은 신학교의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1900년에 자금도 거의 없이 몇명의 학생으로 학교가 시작되었을 때 이 학교가 오래 존속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주위에 거의 없었습니다. 개교 1년 뒤 학교의 설립자가 장티푸스로 죽었을 때 학교의 장래는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후 학교가 잘 운영되는 모습을 만약 그 설립자가 보았다면 놀랐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학교가 100년이나 지속되리라 설립자가 생각했는지 안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 결실들은 영원히 이어지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라는 데는 생각이 같았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사역은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때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확신입니다. 바울은 영생과 예수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승리에 관해 감동의 글을 쓰면서 이런 말로 끝을 맺습니다. ꡒ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ꡓ(고전 15:58).


주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는 결코 무익하거나 헛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끊임없이 주님을 높이며 섬길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J.B. 필립스는 이렇게 잘 요약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당신이 한 것은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헛되이 쓰이지 않습니다."

Service done in Jesus' name

Lasts for all eternity,

For God's Spirit does the work,

Using folks like you and me. -D.De Haan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수고는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과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어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Work done for God endures long after the worker dies.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오래 살아있다.


** "Here I Come" ꡒ지금 갑니다ꡓ


내가 10살쯤 되었을 때 우리집 마당에 있는 큰 소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까지 오르려고 나는 제일 꼭대기에 있는 가지를 잡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오래된 소나무 가지 끝이 꺾어지며 나는 아래로 곤두박질 쳐 등을 땅에 납작하게 대며 떨어졌습니다. 그 충격으로 숨이 탁 막혔습니다. 누워서 숨을 쉬어 보려고 애쓰는 그 순간에 나는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ꡒ나는 지금 하늘 나라로 가는구나ꡓ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에 나는 ꡒ하나님 아버지, 저 지금 가요ꡓ 하고 말했습니다.


근처의 나무 밑에서 책을 읽으시던 아버지가 나의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시고는 급히 달려와 나를 안고 집안으로 옮기셨습니다. 하늘 나라가 아닌 우리집 소파에서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요!


그 경험은 어린 나에게 그리스도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ꡒ육체를 떠나는 것ꡓ은 곧 ꡒ주님과 함께 있는 것ꡓ (고후 5:8)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또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루 하루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당신도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있다면 "음침한 골짜기"(시 23:4)를 걸어가야 할 때에도 놀라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God holds our future in His hands

And gives us every breath;

Just knowing that He's by our side

Allays our fear of death. - Sper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우리 미래를 주관하시고

매 순간마다 숨쉬게 하시니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아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If you live for eternity, you can die with serenity.

영원을 위해 산다면 죽음도 평안히 맞을 수 있다.




***외식자들 - 죠나단 에드워즈


외식자들의 기쁨은 그들 자신 속에 있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뻐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부풀릴 때, 자기들의 시선을 늘 자기 자신들에게 두기 마련입니다. 자기들이 소위 영적인 발견이나 체험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은 후에 그들의 마음은 그것들로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들의 체험을 크게 찬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일차적으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체험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외식자들은 계속 자기 자신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 체험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 발견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났는가! 그런 식으로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그의 아름다움과 온전하심의 자리에 자기들의 체험을 가져다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대신 그들은 자기들의 놀라운 체험을 기뻐합니다. 자기들 밖에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고, 자기들의 영혼을 먹이고 살찌게 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 안에서 드러난 놀라우며 아름답고 새롭게 하는 것들에서 그들의 눈을 떼어 놓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들은 그러한 것들이 그저 주변에 있는 정도로만 보는 것입니다


** Looking For Proof 증거 찾기


내 친구와 나는 하나님과 죽음 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는 ꡒ내가 바라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있었으면 좋겠어ꡓ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11:6에서 우리는 ꡒ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ꡓ라고 한 말씀을 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당연히 계신 것으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정말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세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자연입니다. 바울은 ꡒ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ꡓ (롬 1:20)라고 썼습니다.


두번째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옳고 그름의 기준을 (2:14-15) 우리에게 지적해 주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신 나침반, 곧 양심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진리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이 바로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ꡒ부지런히 하나님을 찾는 자들ꡓ(히 11:6)에게 상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확신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증명해 보이기에는 너무나 크십니다. 증명할 수 있는 신은 증명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믿음에는 근거가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Look not to reason's arguments

If God you seek to find;

Look only to His holy Word,

For sin has made us blind. -D.De Haan

하나님을 찾으려면

논리를 가지고 따지지 마십시오.

오직 거룩하신 그분의 말씀만 찾으세요.

우리는 죄 때문에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The infinite God cannot be measured by finite man.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인간이 측정할 수 없다.


***성도들의 죄 - 토마스 브룩스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가 주님을 가장 괴롭게 하고 슬프게 한다는 것을, 자신들의 죄가 주님의 마음에 가장 힘들고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을, 자신들의 죄가 주님의 눈에 가장 거슬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암 2:13).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됩니다(렘 17:1). 성도들의 죄는 가장 강력한 빛의 광채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죄는 하나님의 가장 인자한 긍휼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죄는 가장 분명하게 보여진 가장 위대한 사랑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죄는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관계를 깨뜨립니다. 성도들의 죄는 가장 탁월하고 가장 숭고한 기대를 깨뜨립니다. 믿는 사람들은 이 사실로 인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게 됩니다.

"오, 주님! 고쳐 주시옵소서. 오, 주님! 고쳐 주시옵소서. 오, 나에게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나에게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용서하시는 긍휼을 전혀 맛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좋습니다. 하오니 깨끗이 씻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예화 줍기>



** 안식의 노래


당신의 가슴에서 쉬고 싶습니다.

나의 중심이 당신의 가슴에 놓이면

천리를 달려온 나그네처럼

정말 세상 모르고 잠들것 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하는 이를 이끌어

간절히 바라는 꿈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하며 아끼며 깊이깊이 간직하며

언젠가는 완성될 깊고 깊은 미래로 만들어 놓습니다.


때로는 때로는

안개 같은 미래의 횃불을 따라 끝도 없이 떠돌다

지칠 대로 지친 빈 손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당신의 가슴에서 쉬고 싶습니다.

손발을 씻을 힘도 없는 나그네처럼

정말로 이제는 배낭의 끄나풀도 풀지 못한 채

무너질 듯 합니다.

아, 물위의 동그라미 속으로 사라지는 빗방울처럼

온 몸으로 당신의 가슴에서 사라지고 싶습니다.




***양면성



이문희 목사(광천교회)


남아공화국 행정수도인 플레토리아 언덕 위에 웅장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호화로움과 웅장함, 주변 자연 경관이 뛰어난 인상깊은 건물이다.


외곽 벽에는 백인들이 처음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 상륙 할 때부터 시작하여 원주민 쥴루족과의 전쟁과정을 부조로 조각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탑에 들어서면 내부 벽면 역시 그들의 삶과 전쟁 그리고 오늘이 있기까지의 남아공의 역사를 웅장하게 조각해 놓았다. 더욱이 인상적인 것은 수십 미터나 되는 탑의 천정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데 그 구멍으로 일년에 딱 한차례만 빛이 들어오는데 그 날이 바로 그들이 승리했다는 12월 16일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역사를 그렇게 아름답고 생생하게 조각화한 건물을 나는 본적이 없다. 이 땅에 사는 그들의 후손들이 이 기념탑 앞에 설 때마다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할까? 생각해보니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탑이 흑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아픔이라는 사실이다. 남아공화국 최초의 흑인정부인 만델라 정권이 들어섰을 때 가장 큰 고민거리가 바로 이 탑이었다고 한다.

무너뜨릴 것인가? 아니면 보존할 것인가?

지혜로운 만델라 대통령은 그것은 우리들의 아픔의 역사로 그대로 두고 우리들의 각오를 새롭게 하는 교훈의 자료로 삼자고 국민들을 설득하여 지금 이대로 건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인간의 역사 또한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승리의 쾌감이 있으면, 패배의 아픔이 있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는 것이다.

문뜩 우리나라 조선총독부건물인 중앙청이 무너진 날이 떠올랐다. 왜 헐었을까? 꼭 그렇게 했어야만 우리의 마음이 시원했는가? 나라가 광복할 때 그곳에 새 정부가 들어섰고, 6.25사변에 수도를 수복할 때 그곳에 깃발이 다시 올라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생각해 보면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얼마든지 가치가 있는 장소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시각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감정이 앞서는 민족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바라기는 감정이 아니기를 원한다.

200년이 넘도록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처참한 삶을 살아 온 흑인들은 그 아픔의 역사를 후손들이 잊어버릴까봐 치가 떨리는 백인들의 승리를 기념하는 탑을 그냥 두기로 했단다.

내 옆에 흑인청년하나가 조각을 유심히 보고있었다. 나는 궁금했다, 무슨 생각을 할까?

이상스럽게도 백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기념탑 안에서 나는 흑인들이 자랑스러워 보였다.




***천사들로 가득 찬 세상


다음은 한미순이란 분의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13년 전, 서른살인 나는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던 어느 날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결혼식도 치르지 못한 채 한 달 반 동안을 의식불명의 상태로 병원에 누워있었다. 그러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목 위의 얼굴만 살아있을 뿐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는 전신장애인인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도저히 이러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 한 손가락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마저 채워질 수 없어 부모, 형제, 누구라도 눈에 띄기만 하면 증오하며 자살을 궁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 자신의 장애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점차 원망과 증오와 절망, 죽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문득 전신장애를 극복하고 입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김준호씨의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우선 입으로 글을 쓰자." 펜을 입에 물고 한 획, 한 획 긋는 연습을 시작했다. 나의 끈질긴 집념을 보던 치료사 선생님이 타자기를 선물해주셨다. 입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쉬웠다. 선생님은 박수를 쳐주시면서 "야아! 한미순 자매님 훌륭해요! 훌륭해요! 드디어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승리의 새 생활이 시작된 거예요." 하고 격려해 주셨다.

1년 6개월 간의 병원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입으로 타자를 쳐서 편지와 일기를 쓸 수 있었다. 나는 구필화가 김준호씨를 찾아갔다. "잘 오셨습니다. 세계 구족 화가협회가 한미순 자매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림 실력이 협회 심사기준에 통과되면 매월 교육비가 나오고 여러 가지 창작 활동을 위한 혜택을 받을 수가 있어요.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한없이 발생할 이런 불행에 대비하여 우리 같은 장애인들의 길잡이가 되라고 자매님을 부르신 겁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방송사를 통하여 그림을 지도해줄 선생님을 찾았습니다. 나의 애절한 호소에 당장 대답하며 달려온 분은 화가 박 선생님이었다. 무료로 매주 한 번씩 출장 지도를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천사는 우리들의 현실 속에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입에 붓을 물고 시작된 나의 그림공부는 피를 흘리는 전투였다. 입안이 헐어서 밥은커녕 물도 넘기기 어려웠고 붓을 입에 물때마다 상처에서 진물 섞인 피가 흘렀다. 선생님의 그렇게도 뜨거운 열정에 감동한 나는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1989년 나는 세계 구족화가협회 학생으로 등록할 수 있었고 6년 후에는 정회원이 되어 그 해 7월에 꿈에 그리던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개인전을 찾아주신 분들께 나의 이름으로 출간된 시집을 나누어 드리는 내 마음은 하늘을 둥실둥실 날았다. 나는 이미 세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고 금년에도 시집 출판 제의와 개인전 전시회를 갖자는 제의를 받고 있다. 아아, 이 세상은 고통을 이기는 천사들과 고통 당한 사람들을 감싸 안아주는 천사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큰 선물인가!

오늘날에도 천사의 존재 여부가 가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만 이 분이 경험한 바와 같이 우리가 괴로움을 당할 때마다 우리에게 인간 모습의 천사들이 우리를 돕는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웃을 생각할 때 바로 당신이 천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제조업자


이문희 목사(광천교회)




톨스토이는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했다. 그렇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신 곳에 사랑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밖에 없다. 행복을 창조하는 실천적 원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명함 뒷면에 이런 글귀를 기록해놓았다.

"행복에 이르는 길: 그대의 머리를 증오로부터 그대의 마음을 걱정으로부터 해방시켜라. 단순하게 생활하라. 조금만 기뻐하고 많이 베풀라. 그대의 삶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라. 빛을 발하라 그대 자신을 잊고 남을 생각하라. 남에게 대접받고자하는 그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상의 일들을 1주일동안만 실천하면 그대는 그대의 변화된 모습에 놀랄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너무나도 단순하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환경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행복은 아침에 눈을 뜰 때 내가 가진 생각 속에 있는 것이다.


언젠가 흥미로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 신사가 기차 식당 칸에서 처음 보는 한 부부와 합석하게 되었다. 그 부인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비싸 보이는 의상과 모피코트, 옷깃에 꽂힌 다이아몬드 핀 등 아주 사치스럽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다. 그녀는 차안이 더럽고 창 틈으로 바람이 들어오며 서비스는 엉망이고, 음식도 형편이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반면 남편은 온화하고 붙임성이 있었으며 태평한 성격을 가진 사람 같아 보였다. 그는 분명 주어진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내의 불평이 길어지자 그 남편이 민망스러웠던지 화제를 바꾸었다.

자신은 법률가이며 자신의 취미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다소 엉뚱한 말을 했다. "그리고 제 아내는 제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의외였다. 그의 부인은 제조업 하는 기업가나 경영자 타입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에 앉아있던 신사가 물었다. "그래요? 부인께서는 무슨 제조업을 하십니까?"

"불행입니다." 사나이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내 아내는 자신의 불행을 제조하고 있답니다."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어디 그 부인뿐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자신의 불행을 제조하는 제조업자들인지 모른다. 이것은 분명 불행한 일이다. 옛날 우리들의 부모가 사시던 시대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가슴에는 불행만 쌓여 가는 것처럼 보인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특별한 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아침에 눈을 뜨면 행복을 기대하며 행복을 제조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왠지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불안한 생각으로 불행을 제조하는 사람인가?

꿈과 기대감이 없이 하루를 사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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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마음 -


하루는 무디 선생님이 설교를 하다가 손에 컵을 들고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하나도 남김없이 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람들은 공기펌프로 빼야 된다느니 하며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때 무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컵에서 공기를 빼면 진공상태가 되어 컵이 깨져 버립니다. 컵이 깨지지 않게 공기를 제거하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공기대신 다른 것을 채우면 됩니다." 하면서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속에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하고 새사람이 되어 살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작심삼일로 끝나고 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깨끗이 비우기는 했지만 그 안에 다른 어떤 것을 대신 채우지 않았기 때문에 깨져버리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성경 빌립보서 2 : 5> 내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채워야 됩니다




**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한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날 랍비가 말하기를, "진리는 길에 널려있는 돌멩이처럼 흔한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그렇게 흔한 것인데 왜 사람들은 진리를 터득하지 못합니까?" 랍비는 다시 대답합니다. "그거야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이지. 허리를 굽히기 싫어하기 때문에 돌을 주울 수가 없단다" 그렇습니다. 허리를 굽혀야 됩니다. 허리를 굽혀야 진리를 터득하고 진리를 터득해야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문희 목사(광천교회)




심철호씨가 대표로 있는 사랑의 전화에서 우리나라 중학생부터 50대까지 남녀 48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다. 그 내용은 행복에 관한 것이었다.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제일 높은 연령이 3,40대이고, 여자보다는 남자의 비율이 높이 나왔다. 그리고 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가장 많이 든 이유가 경제적 어려움, 가족 간의 갈등 그리고 직업상의 스트레스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 같은가?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이라는 말 대신 행복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가능하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이 문장이 명령형이라는 사실이다. 얼른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기쁨이라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 명령한다고 되는 것인가? 슬프다가도 기뻐하라 하면 기뻐해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기뻐하라고 명하신다.

왜 그런가?


유명한 설교자인 스펄전 목사가 신학생들에게 이런 강의를 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천국의 기쁨을 설교하기를 원한다면 표정관리를 잘하세요. 우선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상상하면서 활짝 웃으며, 외치세요. 천국의 기쁨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지옥의 슬픔을 설교하기 원한다면 특별한 표정관리나 노력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지옥의 표정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가?


흔히 한국사람을 비롯해서 동양사람들은 표정이 없다고 비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죄인된 인간의 공통점이다. 우리는 슬픔에 너무나 잘 익숙해져 있다. 기쁨은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슬픔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은 명령한다.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그것도 모자라서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제삼 강조하는 것이다.

기쁨이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스타일이 될 때까지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기쁨과 행복은 노력의 산물이다.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혼하면 행복해 지는가? 출세하면 행복해 지는가?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을 향한 의지가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결론이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들의 죄성 뿐이기 때문이다. 돈 있고 출세하고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생각하는 것이 죄악 된 것뿐인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의지와 신앙만이 우리를 기쁨으로 인도할 것이다.


시각 장애인과 함께 하는 화해와 일치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롬 15:1)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가 있었다. 교인들 중 삼분의 일 정도가 시각장애인들이었다. 주일 11시 예배를 마치고 온 교우들이 다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 시간에는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들어 요란한 수다와 함께 온 교우들이 어울려 음식을 먹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식사시간에는 여러 상을 펴고 한 상에 여러 명이 앉아 식사를 하는데 그 날 그 상에 시각장애인들끼리만 앉아 있었다. 정말 우연치 않게 불편한 일이 일어났다. 시각장애인들은 어디에 어떤 반찬이 있는지 알지 못해서 젓가락이 부딪치고 제대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음식의 위치를 가르쳐 줄 때에는 시계시간을 이용해서 가르쳐 주거나 손을 잡아 한 번 설명해 줌으로써 가르쳐 준다.

그런데 그 날 아무도 음식의 종류와 위치를 가르쳐 줄 사람이 옆에 없었으니 오죽 불편했겠는가? 다음주 그 교회는 광고를 했다.

"여러분 점심식사를 하실 때에 한 상에 시각장애인과 정안자가 함께 앉으세요. 그래서 함께 어울리세요. '어찌하다 보니.'라는 현명한 변명도 삼갑시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아예 식사를 하지 마세요."

그 날 이후로 그 교회에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우리 지체의 연약함을 함께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가까이에 장애자들을 접하고 있다. 먼저 따뜻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장애인들과 한마음이 되어 함께 하는 일에 일치감을 가져야 하겠다.



출 처 함께 나누는 사람들, 2000. 5.








안동우체국, 장애인에 출장서비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9)


경북 안동우체국이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우체국 업무 출장서비스를 실시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6일 안동우체국에 따르면, 장애인들이 우편 업무를 보기 위해 우체국까지 찾아가야 하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이 달부터 직원들이 장애인의 집을 방문해 우편과 금융 등 각종 우체국 업무를 처리하는 출장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안동지역의 시각 및 지체장애인은 모두 1천여 명으로 우체국을 이용하는 데 상당한 불편을 겪고 있으며, 특히 시각장애인의 경우 업무처리 결과를 확인할 수 없어 가족이나 보호자들이 동행해야 하는 이중불편을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장애인들은 앞으로 일반등기와 등기소포우편물 접수, 전자종합통장 가입 및 예금 입.출금, 온라인 송금, 각종 공과금 수납 및 우표류 매입 등의 볼일이 있을 경우 국번 없이 1300번이나 1588-100 번으로 신청하면 접수당일 직원들이 방문, 처리해 주게 된다.

우체국 관계자는 "앞서 지난 한 달간 시범 운영한 결과 예상보다 장애인들의 반응이 좋아 이 달부터 본격 시행하게 되었으며 보다 많은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적용

대부분의 교회들이 신자들을 위해 교회 차를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장애인들을 위하여 얼마나 교회 차를 운행하고 있을까? 대개 장애인들을 위한 교회가 따로 있어 정상인들과 장애인들이 함께 하는 교회를 보기 어려운 것이 현 교회의 현실이다.

그만큼 교회의 문은 장애인에게 닫혀 있으며, 장애인을 위한 배려도 상당히 미흡하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향하여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모습은 오히려 교회의 마땅한 본분이다.



출 처 중앙일보 200. 4. 6





** 유명한 뉴욕 필하모니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대원들에게 폭군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베토벤의 권위자였습니다. 한 번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연주하였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올 때 단원 중 한 사람이 다른 단원에게 속삭이듯 말했습니다.

"오늘은 정말 훌륭한 연주를 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오늘도 토스카니니가 칭찬하지 않고 나무라면 내가 저를 쓰러뜨리겠다."

이때 단원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토스카니니가 그 대원에게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토스카니니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도 여러분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베토벤이 최고입니다!"


** 순종


앗시지 프란시스가 경영하는 수도원에 어느 날, 두 사람이 새로 입원 수속을 했습니다. 성 프란시스는 곧 그들을 데리고 수도원 농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배추를 심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뿌리는 흙 위로 드러나게 하고, 줄거리는 땅속에 파묻어라."

그 중의 한 사람은 시키는 대로했고, 다른 한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말했습니다.

"교부님, 배추는 그렇게 심는 것이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이에 대답했습니다.

"아, 이 사람, 임자는 우리 수도원에는 적합하지는 않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를 퇴원시키고 말았습니다.

프란시스는 제자가 될 사람의 심성과 순종의 도를 살펴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왜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정석 (풀러신학교)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이 있으나,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책이 성경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ꡐ책중의 책(The Bible)ꡑ으로서,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가장 많이 애독되었고 인류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단순한 인간의 명작이 아니라 ꡐ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ꡑ이라고 철저히 믿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경 신앙이 계몽주의적 반기독교 운동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19세기에 발생한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을 인간의 책으로 격하시켰다. 한편, 이에 반동적으로 발생한 근본주의는 사실상 성경의 인간적 요소를 전면 부정하고 축자영감설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극단적 견해는 성경의 사실적 이해를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급기야 무오성 논쟁으로 이어졌다. 20세기 후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학자들 사이에 사소한 성경관의 차이로 대립하고 신학계와 교회가 분열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제 20세기가 끝나면서 그와 같은 소비적 논쟁이 해소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자기 이해


성경은 만나와 같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인간 저자들이 쓴 적고 큰 책들과 편지들을 하나로 묶어놓은 편집서이다. 이와 같이 모두 사람이 쓴 66권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실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 신앙공동체의 상호관계를 서술한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그 나머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전체가 하나님의 어록은 아닐지라도, 성경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원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된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관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는 구약을 의미하는 ꡐ성경ꡑ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사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도 성경을 진리의 규범으로 수용하였다. 성경 안에 ꡐ성경(그라페)ꡑ이라는 단어가 51회 사용되었는데, 모두 절대적 권위로서의 구약성경을 의미한다. 또한 ꡐ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ꡑ(요 5:39)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ꡐ하나님의 말씀ꡑ이라는 문구는 성경에 44회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의미하는 구약의 용례와 달리 신약은 보다 확대된 의미로 사용된다. 복음서에서는 주로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데 그치지만,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주로 예수님의 말씀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며, 종합적으로 구약 성경을 풀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보다 구어적이고 동사적인 말씀이다. 바울 사도는 ꡐ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ꡑ(살전 2:13)라고 긍정하였으며,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들을 ꡐ다른 성경ꡑ과 같은 반열에 위치시켰다(벧후 3:16). 그리하여, 신약이 바울서신을 시작으로 구약에 추가되어 성경이 완성되었다. 요 10:35의 동의어 반복을 통하여 사실상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시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구약의 실현인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증거를 포함해야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경을 ꡐ하나님의 말씀ꡑ이라고 부르는데는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물론, 성경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스스로 말하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순환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자증(autopiston)은 신적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보다 상위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 진실성에 있어서 외적인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는 아무 변명이나 변호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 근거도 없이 맹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과 논리의 한계에 관한 한, 설득력있는 증거들을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성경은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 서로 알지 못하는 저자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쓰여졌고 자신들의 책이 66권의 일부가 되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기록했으나 66권의 책들이 한 성경으로 집합될 때 그 진가를 발휘하며,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성을 가진 하나의 조화된 대작을 이루고 있다. 이 얼마나 신비한 책인가?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인류가 소유한 책중에서 인간의 본질과 문제, 그리고 그 해결책을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영적 심오성과 적용성, 그리고 감화력과 윤리성 등에 있어서 실로 최고의 책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서 성경 외에 어떤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겠는가? 그리고, 모두 진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도들이 한 목소리로 증거하는 성경이 왜 거짓을 말하겠는가? 이와 같은 증거들은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를 거부하는 영적 저항이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말로도 설득할 수 없다. 따라서, 칼빈은 우리 마음속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ꡐ성령의 내적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ꡑ에서 그 궁극적 해답을 찾았다.




말씀과 상황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성경이라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은 인간의 발상이 아니었다. 최초의 성경인 오경은 성경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 것이다. 십계명 돌판에 하나님이 친히 쓰신 기록이 성경의 원형이며,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 역사적 배경을 동시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였다(출 34.27, 민 33.2). 그리하여, 말씀과 상황, 텍스트와 컨텍스트가 함께 기록되어 성경을 형성하였는데, 이는 컨텍스트 없이 텍스트가 올바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과 상황은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두 요소가 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 둘이 결합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잠언이나 전도서와 같이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지 않고 사람의 말과 지혜가 기록된 책도 있으며, 욥기와 같이 대부분이 사람들의 논란으로 구성된 책도 있다.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사탄의 말도 있고 바리새인의 말도 있으며, 서신서를 비롯한 성경의 많은 책들은 사실상 사람의 말과 글이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성경이 인간의 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는 것은 기록과정의 신비한 영감작용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말이 모세나 바울의 말을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과 정확히 동등한 위치에 놓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딤전 3장 16절을 인용하며 모든 성경을 무차별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사도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것이 올바른 전통(paradosis)을 형성하지만, 예수님과 제자의 대화에서 양자의 말에 동일한 신적 권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사도의 권위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적 권위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본질적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도나 선지자의 말은 독립적 권위가 아니라 보조적이며 의존적인 권위를 가진다. 물론 성경과 설교는 다르지만,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고 해서, 목사가 독립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성경에서 권위적인 본문과 보조적인 컨텍스트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욥기 3-37장에는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의 토론이 계속되는데, 38장 이하에서 모두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그 토론의 내용 일부를 본문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 말씀과 상황,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올바로 식별하고 통전적으로 해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령이 전체적 조망을 가지고 영감하였으므로, 성경은 보다 통전적이고 종합적인 진리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기록에 영감(inspiration)으로 역사했던 성령의 조명(illumination)이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무오성의 문제


찰스 하지는 성경을 파르테논 신전에 비교하면서, 거대한 대리석 건물에 극히 미세한 모래들이 좀 박혀 있다고 하여 대리석 건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 반문하였다. 실로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벤자민 워필드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한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강력한 근본주의 성경관을 제시하면서 성경에는 추호의 모래알도 박혀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철저한 무오설은 성경의 모든 글자와 일점일획까지 신이 선택했다는 ꡐ축자영감설ꡑ을 결과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한 성경이 사본들의 원문비평에 의한 것이어서 보다 고대의 탁월한 사본 혹은 원본 발견이나 보다 정교한 원문비평방법의 개발을 통해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여, 원본의 무오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원본의 무오설을 주장함으로서 사실상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의 오류를 인정하는 우를 범하였다. 더욱이, 그는 ꡐ차이(discrepancy)ꡑ와 ꡑ오류(error)ꡑ를 동일시하면서 그와 같이 그릇된 정의를 축자영감설과 연결시킴으로서, 성경 전체에서 한 자만 혹은 한 획만 틀려도 전 성경이 영감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위험을 초래하였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사본의 발견이나 새로운 원문비평을 통해 변할 수 있는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무시될 수 있는 극히 적은 부분이다. 그런 변화가 구원의 복음이나 기독교 사상에 아무런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수 없다. 또한, 성경에서 발견되는 차이도 복음의 본질과 전혀 상관이 없다. 예를 들자면, 출애급 과정에서 이방여인과 간음하다 저주를 받아 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구약에는 24000명, 신약에는 23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명의 차이가 축자영감설에서 볼 때는 거대한 문제이지만, 복음의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무엘서에 700승으로 기록된 아람병거의 수가 역대기에는 7000승으로 되어 있다. 비록 10배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무슨 본질적 차이를 결과한단 말인가.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차이에 불과하다. 에릭슨이 지적한 대로, 오류란 성경의 주장이나 가르침의 문제이지 결코 단순한 데이터의 인용이나 보고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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