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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상원의원 신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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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군의관이 뿌린 사랑의 씨앗이 한 거지소년을 교수요, 워싱턴주의 상원의원이 되게 하였다. 교회에서도 소외된 아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겠다.2, 요셉과 같이 비록 거지 신세였지만 꿈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노력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음으로 오늘날과 같은 축복을 받았다.♤ 신호범 의원은…1935년 경기도 파주시 금촌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남대문에서 거지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 후 미군 하우스보이로 일하다 18세 나이로 미국에 입양되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학력으로 미국 검정고시에 합격,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동양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하와이 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워싱턴 주 하원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워싱턴 주 상원의원으로 교통, 무역, 교육 등 3개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선거 유세기간 중 그는 모두 네 켤레의 구두를 갈아 신어야 했다. 동양인이란 핸디캡에 별다른 정치적 배경이 없는 그가 택한 선거운동은 호별 방문. 말을 건넬 여유도 없이 그의 얼굴색만 보고 쾅하고 문을 닫아버리거나,‘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란 욕설을 듣기도 했지만 선거 운동기간에 63세의 그는 무려 2만9천 가구를 방문했다. 그리고 결국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미국 워싱턴 주 신호범 상원의원(64세). 그의 성공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 입양아 출신.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마저 집을 나가, 서울역 거지로 미군 하우스보이로 떠돌았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열여덟 살짜리 입양아가 되어 미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대학교수가 되고, 주 상원의원이 됐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도, 인종차별의 높은 벽도 그에게는 넘지 못할 장애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네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아버지마저 떠난 고아 신세“저는 불행히도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내 기억 속의 유일한 어머니는 소나무 속껍질 삶은 물을 옷에 흘렸다고 날 야단치던 모습뿐입니다.”그를 낳자마자 유방암에 걸렸던 어머니는 결국 그가 네 살 되던 해에 숨을 거뒀다. 머슴이었던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아들을 외가에 맡기고는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늙은 외할머니와 과부 숙모, 어린 사촌만 줄줄이 있던 외가에서 어린 신호범은 눈칫밥 먹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어느 날 밖에서 돌아와 보니 외가 식구들이 둘러앉아 엿을 깨먹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미 제 몫은 남아 있지 않았죠. 급한 마음에 옆에 있던 어린 사촌동생의 손에 들린 엿을 빼앗아 들었어요. 제 엿을 빼앗긴 동생은 뒤로 나자빠지며 까무러칠 듯 울음을 터뜨렸고, 화가 난 외숙모는 엿을 쪼개던 방망이로 내 등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습니다.”그 날로 집을 뛰쳐나왔다. 이 다음에 크면 꼭 엿장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무작정 올라탄 도둑기차를 타고 2시간 만에 도착한 서울.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일본 순사를 피해 달려간 곳이 남대문 먹자골목이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소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솥 앞을 떠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었다. 한눈에도 시골뜨기에 엄마 잃은 아이로 보여 불쌍했는지 아주머니가 국수 한 그릇을 말아 주었고, 콧물을 빠뜨려가며 먹은 그 국수 맛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렇게 시작된 남대문 거지생활. 하지만 그 해 겨울 견딜 수 없는 추위에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다.“그 때 아버지가 나를 찾으러 왔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나를 외갓집에 맡기고 어딘가에 머슴살이를 간 것이었어요. 그러다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다가 돌아와 재혼을 한 상태였죠.”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영등포의 단칸 셋방이었다. 하지만 아직 얌전한 새색시인 새어머니가 어려웠고, 말 없는 아버지가 무섭기만 했다. 다시 집을 나와 서울역에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난 뒤 다시 아버지 집에 갔지만, 단칸 셋방은 여전한데 주렁주렁 늘어난 동생들과 예전보다 더 허덕이는 새어머니를 보고 다시 서울역으로 향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어린 신호범은 여전히 소년 거지로 남아 있었다.“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부럽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보면 거지새끼라고 놀리고 돌을 던지거나 이유 없이 때리기도 했지만 정작 아픈 것은 남들처럼 학교에 가지 못하는 제 마음이었습니다.”글을 못 읽는 것이 답답해진 그는 거리의 간판을 보며 한 자 한 자 외우기 시작했다. 시장 골목이나 길바닥에 나뒹구는 신문지 조각을 주워 들고 깡패 형님들에게 물어가며 한글을 겨우 깨치게 되었다.1950년 6월 25일에 터진 전쟁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서울에 주둔한 미군 트럭에 우연히 올라탄 것이 인연이 되어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누더기 대신 입어보는 깨끗한 군복에 가죽 신발. 뜨거운 물에 목욕까지 하니 거지가 왕자 옷을 입고 궁전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영어는 한 마디도 몰랐지만 어려서부터 먹었던 눈칫밥() 덕분인지 그는 장교들의 시중 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었지만 서울역 거지생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장교들은 동작 빠르고 눈치 빠른 그를 ‘벅숏(총알)’이라 부르며 귀여워해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일생의 은인인 미군 군의관 폴 대위를 만났다.“폴 대위는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일과 후 그는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했고, 엉터리 영어였지만 제가 따라다니면서 통역을 했어요. 어느날 그가 나를 아들로 삼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이미 가족들과 이야기를 끝낸 상태여서 나만 좋다면 문제가 없다는 거였습니다. 미국에 가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는 말에 좋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폴 대위를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었고, 그와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늘 마음 아파하던 아버지는 아들의 미국행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파란만장했던 전방의 하우스보이 생활을 접던 날, 부대의 유일한 흑인 장교였던 부스 중위는 떠나는 그에게 “미국은 천국이 아니야. 조심해야 해”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여권과 여비를 마련해 도착한 미국에서 그는 부스 중위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라 침을 뱉으며 미국행 배를 탔지만 거기서부터 전 완벽한 이방인이었습니다. 미국인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 유학생이었던 한국인들과도 결코 어울릴 수 없었으니까요.”♤ 이복 동생 모두 미국으로 불러친아버지와 새어머니도 모셔기대에 부풀어 미국 땅을 밟았지만 양아버지 폴 대위를 제외한 새 가족들은 낯선 동양인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대부분의 주에서 유색인종과 백인의 결혼은 불법이었고, 음식점과 버스도 백인 전용이 많았다. 거기다 열 여덟 살이나 먹은 덩치 큰 입양아라니.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양어머니는 냉랭했다. 동생들은 적대감을 드러내기조차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양어머니와 동생들은 처음부터 그의 입양을 반대했던 것이다. 양어머니의 집안일을 열심히 돕고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동생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었지만 가족들의 시선은 여전히 차가웠다. 더욱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그를 받아주려는 미국 학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마지막으로 찾아간 학교에서도 입학을 거절당하고 나니 눈물이 비오듯 흘렀습니다. 이것을 본 교장이 불쌍했던지 검정고시를 볼 수 있도록 특별지도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알파벳부터 시작한 공부. 하루 여섯 시간의 아르바이트에 집안일까지 거드니 잠은 세 시간 이상 잘 수 없었다. 늘 코피를 달고 살았지만 정말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결국 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꿈에서나 가능 했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입학 후 날아온 입대영장. 그나마 인종차별이 덜했던 군대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백인 동료들과 들어간 백인 전용식당에서 몰매를 맞고 쫓겨난 것이다.“들어갈 때는 같은 군인인데 어떠랴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엉덩이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닿는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인종차별의 벽은 높다. 결국 우리가 힘을 키워야 한다’. 막연했지만 그 때 처음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하지만 당시 동양인에게 정계 진출이란 실현 불가능한 꿈이었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하와이 대학에서 동양학과 교수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면서 결혼도 했다. 부인은 대학에서 만난 미국 아가씨. 결혼조건은 예비사위로 처가살이를 하는 것이었다. 6개월 동안 그의 성실성을 지켜본 장인은 결혼을 허락했지만, 장모는 결혼식 직전까지도 반대했다. 하지만 결혼 2년 뒤 장인이 돌아가시고 그가 장모를 모시면서 장모가 가장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사위가 되었다.“저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웠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입양아입니다. 아내가 유산으로 더 이상 임신이 어렵게 되자 입양을 결심했습니다. 저도 입양아였고, 제 양부모님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저나 제처한테 입양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한국 혼혈아 둘을 입양했고, 지금은 모두 잘 자라서 그 아이들도 부모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피보다 더 진한 법입니다.”♤ 백인 전용 식당 들어갔다 몰매인종차별 뚫고 주 상원의원 당선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부터는 기회가 되는 대로 한국에 나와 친아버지를 찾았다. 한국의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다섯 명의 이복 동생들과 함께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복 동생들을 한 명씩 미국으로 불러 공부시키고, 마지막으로는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교수 월급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시작한 부업이 부동산 매매. 헌집을 사서 새집처럼 고쳐놓은 후 값을 얹어 파는 일이었다. 교수생활을 하는 짬짬이 하우스보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집수리를 혼자 힘으로 해냈다. 운이 좋았는지 손대는 집마다 성공했고, 나중에는 미국 굴지의 부동산 회사가 그에게 동업을 제안해올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서 거절했다.“지금 생각해보면 가르치는 일이 제 천직인 것 같습니다. 처음 미국으로 갈 때도 그랬어요. 막연했지만 선생님이 되고 싶었죠. 서울역 거지시절 초등학교 교실 유리창너머로 아이들 공부하는 걸 훔쳐보다 경찰한테 얻어맞은 뒤로 줄곧 공부해서 선생님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에 와서 그 꿈을 이룬 셈이죠.”미국에서 당한 인종차별의 고통은 그에게 정치인이란 또 다른 꿈을 주었고, 처음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꿈을 실현시킬 기회가 온다. 그가 자문을 맡고 있던 워싱턴 주지사가 그에게 주 하원 출마를 권유한 것. 처음에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여서 사양했다. 유권자의 94%가백인인 워싱턴 주에서는 동양인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전례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때 LA폭동이 터졌고, 미국사회에서 한국 이민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정계입문을 결심했다. 그리고 선거운동 7개월 동안 하루 평균 1백50가구, 모두 1만4천 가구를 방문하는 개별 방문 유세로 워싱턴 주 최초의 아시아계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 후 연방 하원, 워싱턴 주 부지사 선거에서 내리탈락하는 좌절을 겪었으나 98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워싱턴 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다시 한 번 신화를 일구어낸 것이다.고아 아닌 고아 신세, 서울역에서의 거지생활, 하우스보이를 거쳐 18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돼 결국은 워싱턴 주 상원의원으로까지 성공한 그만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제가 신앙을 갖고 있어서일까요. 저는 지금의 제 상태를 ‘성공’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대신 ‘축복’이라 말하고 싶군요.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거지생활 끝에 하우스보이가 된 것도, 양아버지를 만난 것도 저한테는 모두 축복이었습니다. 특별히 가난은 제가 받은 가장 큰 축복이었죠. 그 하나 하나가 제게는 모두 축복이자 기회였습니다. 저는 다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뿐이죠. 그래서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나를 사랑했던 사람도, 나를 미워하고 괴롭힌 사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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