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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과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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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용의 문화이야기] 다수결의 이름으로…예수 십자가 처형은 다수결의 횡포 빌라도는 ‘진리’보다 ‘다수결’을 택해 소수를 외롭고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자기독교인들이 가장 미워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아마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가룟 유다일 것이다.‘유다의 키스’란 말은 스승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그 분을팔아 넘겼다 하여 나온 배신의 상징어다.하마터면 베드로의 칼을 맞을 뻔한배신자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그러면 기독교인들로부터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사람은 누구일까.그는 뜻밖에도빌라도다.그는 로마 총독으로서 10년간이나 유대인들을 다스렸다.기록에 따르면그는 매우 포악하고 잔인하며 비겁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도 자살로 생을마감했다고 한다.그는 예수님을 군중에게 내준 후 손을 씻으며 자신의 무죄함을 선언했다.그러나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2000년동안 그를 예수 처형의 주범으로인정해왔다.오늘도 기독교인들은 모일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며 사도신경을 왼다.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나,그 분을 체포해 재판에 회부한종교지도자들,이성을 잃고 그 분을 처형하라고 외친 군중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않으면서,유독 자신만을 주범으로 몰고 있는 사도신경에 대해 빌라도는 부당하다며억울해 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사도신경이 개정될 것 같지는 않다.지도자로서 빌라도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예수님이 무죄인 줄 알면서도 절대적인기준을 집어던지고,‘다수’의 목소리를 기준으로 삼았으며,결과적으로 직무를유기했다는 점이다.리더십에서 최악으로 꼽는 유형이 몇 가지 있다.첫번째 유형은무식하면서 결단력이 있는 경우다.무식하면 용감하다고,이 유형은 어떤 일을저지를지 알 수가 없다.자고로 ‘사고(思考)’하지 않으면 ‘사고(事故)’를 내게마련이다.두번째 유형은 유식하지만 소신이 없는 경우다.빌라도가 이 유형이라하겠는데,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자신의 소신을 감추었다.“진리는 결코 죽지 않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죽을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는 ‘진리’보다는 ‘다수’쪽을 택했다.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긴다.‘다수결’은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는 물론이고 교회 내에서도 매우 중시되고 있다.이번총선에서도 우리는 다수결 원칙에 따라 국회의원을 선출했다.그러나 다수결의원칙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역사상 다수결의 원칙이 저지른 만행은 수없이많다.다수결의 원칙은 폭력과 독재,비극의 근거로 수없이 남용돼 왔다.대표적인사례가 예수님의 처형이다.과거 우리 나라의 독재 정치를 유지시켜준 근거도 따지고보면 다수결의 원칙이다.아이러니하게도 선지자들은 언제나 소수였다.예수님도 외로운소수이셨다.기독교는 어찌보면 다수결의 종교라기보다는 소수결의 종교에가깝다.교회가 모든 문제를 다수결에 의존하려 한다면 ‘민주주의 교회’일 수는있어도 진정한 ‘진리의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수결 문화에 너무도 익숙한 나머지 매사를 그것으로밀어붙이려는 경향이 있다.빌라도의 실수에서 보듯이 다수가 옳고 그름,진리와거짓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사회의 모든 가치가 다수에 쏠리더라도 교회만은 외롭고의로운 소수의 목소리를 경청하고,사회 문제에 있어서도 진리의 원칙에 따라 외롭고의로운 소수의 입장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난주간이다.직장과 사회,가정과 교회에서 ‘다수결의 이름으로’ 소수를 외롭고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사는 방식을 한번 되돌아보자./교회문화연구소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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