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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 창시자 제리양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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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9세인 제리 양은 타이완(대만) 출신. 10살 때 영어-드라마를 가르치던 어머니(아버지는 2세때 사망), 남동생과 함께 샌호제이로 이 민 왔다. 이민 당시 영어 단어라고는 '구두(shoe)' 밖에 몰랐지만, 90 년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에서 학-석사 2중 학위를 받기까지 '전과목 A학점' 학생이었다.인터넷에 빠져든 것은 이 대학 컴퓨터공학 박사과정 시절. 박사과정 단짝 친구인 파일로와 함께 논문 준비 겸 취미로 좋아하는 웹사이트 목 록을 만들어 '데이브와 제리의 인터넷 월드와이드 웹(WWW)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무료로 공개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지도교수가 94 년 안식년을 맞자, 핑계김에 '재미없는' 제목의 논문 작성을 제쳐두고 세탁물과 빈 피자박스가 뒹구는 자신들의 방에서 인터넷 디렉토리 작성 에 매달렸다. 그 시절 "몸 냄새도 나는"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수면 과 돈, 영양보충, 깨끗한 옷이었다고 제리 양은 기억한다.97년 코스타리카 출신 일본계 여성과 결혼했다. 하지만, 신혼 여행 때도 랩톱 컴퓨터를 갖고가 하루에 두번은 전자 메일(E mail)을 확인했다.그는 "우리가 시작하지 않았더라도, 무질서한 인터넷 세계를 누군가 조직화하는 작업에 나섰을 것"이라고 말했다.스탠포드 재학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자. 처음에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 준비를 위해 인터넷 디렉토리를 만들었을때 오늘날과 같은 사업을 예상했었나. "물론 절대 아니다. 데이비드와 내가 이것을 시작했던 94년 우리에겐 비지니스 모델도, '이봐, 이게 나중에 큰 사업이 될 거야'라는 인식도 없었다. 우리가 인터넷의 유용한 웹사이트를 정리해 공개하자, 차츰 구전(구전)을 통해서 전세계에서 반응이 왔지만 우리 생각은 그저 '나중에 우리의 웹사이트 디렉토리 사용자들에게 요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였다. 그러다가 95년에 벤처 캐피털리스트(자금 지원 회사)와 얘기를 했고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매체 모델로 발전시켜 보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여전히 처음엔 '조금 더 해보다 가 안되면 다른 것을 하지'하는 생각이었다.▲그러다가 결국 박사 학위취득은 포기하고 이 사업에 매진하게 된 것인가. "5년간 박사과정에 있었고, 6개월만 더하면 논문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도 박사 학위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늘 적극적으로 날 지원하시는 어머니께서도 내가 '잠시 박사 공부를 중단하고 이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는 분명히 아들이 공부를 마치는 것을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야후!를 시작할때 생각은 '야후!가 성공하면 끝내 박사 과정을 마치지 못할 것'이라고 느끼면서도,'실패하면 마저 공부하지'였다. 물론 지금의 선택을 좋아한다. 내 논문 주제도 별로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고….▲야후!라는 회사 이름뿐 아니라, 회사내 직위 이름도 재미있다. 우선 당신의 직위는 '치프(Chief·추장) 야후'이고, 홍보 담당자는 'PR 디버(Diva·오페라의 주연 여가수),' 한 대변인의 직명은 '대변의 명수(명수·Spokesperson Maven)'였다. 이렇게 자유로운 직위 이름 짓기를 허용하는 이유는 뭔가. "우리는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매우 비(비)형식적인 회사 분위기를 만드려고 한다. 직원들도 '과장'이니 '국장'이니 하는 계급적인 이름을 원치 않아, 저마다 외부 고객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스스로 만든다. 그게 고객들에게도 흥미롭지 않겠는가. 예컨대, '세계 최고의 야후'와 같은 너무 황당한 이름이 아닌 한,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야후!에는 또 실제로 관리직도 별로 없다. 그보다는 각자가 구체적인 일을 할 수 있게끔 회사가 설립됐다. 또, 엔지니어들은 '테크니컬 야후'로, 인터넷 정보검색(surfing) 분야 직원들은 '서핑 야후' '야후 서퍼'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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