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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유행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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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7:21에 보면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라는 구절이 있다.새로 나오는 것만 좇아가는 아덴 사람들의 특징은 현대인과 닮았다. 하긴 그 당시에는 아덴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 가장 현대적인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을 것이다.새로운 것만을 추구하고 그 외의 것에는 별로 가치를 두지 않는 경향을 카이노시즘(kainosism)이라 부를 수 있겠다.헬라어 카이노스(새로운)와 이즘을 합하여 필자가 만들어본 용어다.탤런트 김희선이 새 팔찌를 끼고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면 그 다음날 남대문시장에는 벌써 김희선 팔찌라는 것이 나온다고 한다.이런 유행이야 카이노시즘이라고 이름 불일 필요도 없는 극히 일상적인 모습에 불과하다.문제는 좀 묵직하고 끈기있는 연구를 통해 그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학문 분야에서조차 카이노시즘이 횡행하고 있는 현상이다. 필자가 살아온 시대를 훑어보더라도 대학시절에는 실존주의가 유행병처럼 번지다가 어느새 구조주의,해체주의 하더니 포스트모더니즘 어쩌고 하는 시대로 넘어갔다.필자 같은 문외한들도 정신이 없는데 그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더욱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론들에 뒤쳐지면 그 분야에서 도태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큰 스트레스로 작용할지도 모른다.인터넷의 출현으로 카이노시즘은 각 분야에서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확대될 전망이다.물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발전시켜나가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문제는 자아의 뿌리가 뽑히고 내면이 해체될 정도로 정신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다가는 새로운 것을 발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들에 깔려 질식사하기 딱 알맞다. 벌써부터 그런 정신병적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심리학자 칼 융은 현대인의 정신적 병들이 바로 이러한 카이노시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역행이 발전’이라는 역설적 명제를 내어 걸고 실제로 그 명제를 실천했다. 그는 취리히 호수 북부의 볼링겐 지역에 ‘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층 원형 가옥집을 짓고 문명과 철저히 격리된 가운데 역행을 통해 얼마나 정신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는가를 체험해보았다.이러한 융의 명제는 요즈음 들어 더욱 곱씹어볼 만하다. 특히 사람들의 정신적, 영적 문제를 책임지는 교회들은 시대의 유행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역행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천천히 걸어가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 아니, 과감히 역행을 꾀할 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재벌들이 부자세습으로 나아가는 추세에 과감히 역행해 교회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데살로니가전서 5:22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다. 비록 그것이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모양을 갖춘 것이면 버리라는 말씀이다. 그런 모양을 갖추어놓고 재벌 세습과는 다르다느니 세습이라는 용어가 부적합하다느니 합리화하는 것은 담배를 들고 다니면서 자기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그리고 인터넷으로 야단법석을 피우는 이 시대에 교회마저 인터넷에 휩쓸려드는 것은 너무 조급하지 않나 싶다. 교회를 소개하는 아담한 홈페이지 하나 정도 가지고 있어도 될 것을,왜 그리 무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교회는 아무래도 이 시대의 물신주의에 역행해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신 것처럼(마가복음 10:21),자발적인 가난을 택하고 유행에 뒤쳐지는 듯 소걸음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이 카이노시즘으로 정신이 황폐해져 가는 현대인들을 시골 어머니처럼 품고 치료할 수 있는 교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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