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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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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박사그의 아버지 우범선은 구한말 군사조직인 별기군의 훈련군관이었는데 친일파였던 그는 을미년 민비 시해 현장에서 그 참혹한 임종을 지켜보고 시신의 뒷수습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 후 단신으로 일본에 망명하여 기타노란 이름으로 숨어살다 고종측인인 고영근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는 일본인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우장춘박사이다."어머니 아이들이 센진노코(조선놈의 자식)이라고 놀려요""그런 것에 주눅들 필요 없다. 너는 자랑스러운 조선 혁명가의 아들이다. 넌 발에 밟혀도 꽃을 피우는 민들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그의 어머니는 비극적 그의 운명을 바로 잡아 주려고 했다. 한 때 고아원에 맡겨질 정도로 궁핍과 천대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우장춘의 일본인 어머니는 어린 그의 내면에 끊임없이 '조선 혁명가의 아들'이라는 자긍심을 북돋아 주었고 그것이 훗날 그의 민족의식의 뿌리를 이루게 된다.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고 다윈의 진화론에 수정을 가한 '종의 합성'이론으로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성장한 우장춘에게 일본 농림성은 중국에 신설된 면화시험장장으로 승진 발령하면서 창씨개명과 일본 국적 취득을 요구했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사표를 던진다. 그러다 해방이 되자 귀국을 서둘렀다. 일본정부가 대마도는 줄 수 있어도 우장춘은 내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결국 그는 일본인 아내과 여섯 자녀를 일본에 남겨두고 밀입국자 및 불법체류자 수용소에 자진 입소해 1953년 3월 부산으로 오는 38변째 강제 송환선을 탄다. 전쟁의 와중이었지만 한국 정부는 대대적인 환영행사로 그를 맞았고 우장춘은 감격어린 어조로 인사말을 했다. "나는 어머니의 나라를 위해 이제까지 어떤 일본인보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런후에 자랑스럽게 제 뼈를 조국에 묻겠습니다."우장춘은 예순 한해의 생애 중 아홉해 다섯달 동안을 조국을 위해 헌신했다. 벼품중 개량에 몰두하고 있던 1959년 8월 십이지장궤양 수술부위의 감염이 악화돼 입원했을 때 그는 비로소 아내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내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과 며칠 뒤인 8월11일 눈을 감는다. 임종을 사흘 앞두고 정부는 그에게 문화포장을 내렸고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도움말: 모세가 애굽의 영화를 거절하고 이스라엘백성과 애환을 함께한 것같이 우장춘박사도 일본에서의 영화를 버리고 가난했던 조국에 돌아와 봉사한 그의 지조와 봉사를 새겨볼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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