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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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세상 살맛이 나는 것 같다. 살맛 나는 세상에선 신문도 읽을 맛이 있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정색하고 거드름빼는 그 잘난 1면 톱기사 때문이 아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 외등처럼 잠자코 비켜서 있는 작은 뉴스들 덕분이다.어제 아침신문엔 마흔 세살의 청년황제 빌 게이츠가 질병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 아동들에 대한 백신 보급을 위해 1억달러를 기증한다는 소식이 실렸다. 생각이 바뀐 것일까. 게이츠는 작년 이맘때 앞으로 10년간 경영에 더종사한 후 자선활동에 나서겠다고 했었는데…. 이땐 자선활동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한 잡지(BENEFACTOR)도 거들고 나왔었다. {당신 나이로 봐선 우선 돈을 더 벌라. 그러고나서 행동해도 늦지않다….}.그제 신문에선 그동안 모아온 이웃돕기성금 627억원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뉴스가 눈에 띈다. 액수는 게이츠 한 사람이 기부한 액수의 꼭절반이다. 그래도 덧붙인 설명 때문에 위안이 된다. IMF 이전 보다 오히려 더 잘 걷혔다는 이야기다. 지난 몇년 불황을 모르는 별세계가 미국이다. 이 미국에서 그동안 자선 활동의 기둥이던 중산층의 기부가 급격히 줄고 있다. 93년 기준으로 이웃을 위해 호주머니를 털던 300여만 가구의 중산층이 은혜의 손을 거두어 들였다는 보고까지 나와 있다.고사리손으로 단 등이어서 그런가. 그끄제의 불빛은 유난히 밝고 따뜻하다. {아빠, 제 1년치 용돈 5만원을 한꺼번에 주시면 안돼요. 제 짝이 점심을 굶고 있어요….}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가 아버지에게 보낸 이 편지가 계기가 돼서 점심을 걸러야 하는 이 지역 전체 결식학생들에게 몰아치던 찬바람을 막아주게 됐다는 기사다. 올 겨울은 무척 추울 것이라는 게 관상대의 장기예보다. 라니냐 현상이 불러온 기상이변 탓이라는 분석이다. 그래도 그건 수은주의 온도다. 사회의 온도는 더 떨어질것이다. 부도, 실직, 해고, 감봉, 취업불능이란 단어들이 만들어 낸 냉기류 탓이다. 그래서 따뜻하고 밝은 소식에 더 목말라하고 있는 것 같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내려오지만, 한국은 아직 자선과 기부의 사회는 못된다. 유럽도 본바닥은 아니다. 자선과 기부의 나라는 여전히 미국이다. 한해 150억달러 이상이 개인 호주머니에서 나온다. 회사돈을 대표이사 이름으로 내놓는 게 아니다.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Winner Take All)]는 경기규칙의 나라가 미국이다.그래서 이 나라의 자선과 기부는 역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뼘 깊이만 더 생각하면, 이런 비정한 경기규칙이 유지될 수 있는 것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선과 기부 덕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생애의 절반을 무자비한 기업인으로 살았던 석유왕 존 록펠러는 생애의 후반에 54억달러(현재의 달러가치 기준)를 기부했다.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전재산에 해당하는 45억달러(현재 달러 가치 기준)를 내놓았다. 카네기의 유언장을 공개하는 것은 조금 겁나는 일이다. 자기는 멋대로 살면서, 남더러는 성자처럼 살라고 주문하는 우리 사회 분위기 탓이다. 그래서 이 부분만 열어보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부인과 딸에게도 총재산의 몇천분의 1정도를 남겨주었다는 사실과 그것도 그 재산은 상속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는 사실 정도다. 더 놀라운 것은 카네기나 록펠러가 넘어져 있는 사람의 손에 돈을 쥐어주는 데는 한없이 인색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선 대상을 다시 일어서려는 사람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무자비한] 자선가였다. 이런 미국의 무자비한 자선 철학의 완성자는 줄리어스 로즌월드다.한때는 한국 관광객들도 자주 드나들던 시어즈로벅백화점의 소유자였던 사람이다. 일생동안 흑인교육을 위해 5,357개의 공립학교 설립을 지원했던 로즌월드의 발언은 놀랍고 충격적이다.자신의 기부를 기념하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도록한 그여서 더욱 의외로 들린다. {나는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자선을 싫어한다. 아니 메스꺼움까지 느낀다….}무자비한 자선 철학의 완성자다운 이야기다. 우리는 이런 미국인만큼 모질지 못하다. 우리의 처지 역시 눈물겨운 자선과 무자비한 자선을 가릴 형편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IMF 이후 우리 사회의 게임 규칙이 승자가 더 많이 가지는 쪽으로 움직여가고 있다는 점과 이런 경기규칙은 더 많이 갖는 사람들의 지혜로운 결단 없이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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