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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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팔 접경의 이 북쪽 마을은 드높이 갠 가을 하늘 아래 한껏 고즈넉했다.주인 없는 집 봉당에 흰 박통을 의지하고 둘러있었다.어쩌다 만나는 늙은이는 담뱃대부터 뒤로 돌렸다.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멀찍이서 미리 길을 비꼈다. 모두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동네 전체로는 이번 동란에 깨어진 자국이라곤 별로 없었다. 그러나,어쩐지 자기가 어려서 자란 옛 마을은 아닌 성싶었다.뒷산 밤나무 기슭에서 성삼이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거기 한 나무에 기어올랐다. 귓 속 멀리서, '요놈의 자식들이 또 남의 밤나무에 올라가는구나.'하는 혹부리 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그 혹부리 할아버지도 그새세상을 떠났는가. 몇 사람 만난 동네 늙은이 가운데 뵈지 않았다.성삼이는 밤나무를 안은 채 잠시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 보았다. 흔들지도않은 밤나무 가지에서 남은 밤송이가 저 혼자 아람이 벌어 떨어져내렸다.임시 치안대 사무소로 쓰고 있는 집 앞에 이르니 웬 청년 하나가 포승에꽁꽁 묶여 있다.이 마을에서 처음 보다시피 하는 젊은이라, 가까이 가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바고, 어려서 단짝 동무였던 덕재가 아니냐.천태에서 같이 치안 대원에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농민 동맹 부위원장을 지낸 놈인데, 지금 자기 집에 잠복해 있는 있는 걸 붙들어 왔다는 것이다.성삼이는 다 탄 담배 꽁초에서 새로 담뱃불을 댕겨 가지고 일어섰다."이 자식은 내가 데리고 가지요."덕재는 한결같이 외면한 채 성삼이 쪽은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동구 밖을 벗어났다.성삼이는 연거푸 담배만 피웠다. 담배 맛을 몰랐다. 그저 연기만 기껏 빨았다 내뿜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덕재 녀석도 담배 생각이 나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 어른들 몰래 담모퉁이에서 호박잎 담배를 나눠피우던 생각이 났다. 그러나 오늘 이깟놈에게 담배를 권하다니 될 말이냐한번은 어려서 덕재와 같이 혹부리 할아버지네 밤을 훔치러 간 일이 있었다. 성삼이가 나무에 올라갈 차례였다. 별안간 혹부리 할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엉덩이에 밤송이가 찔렀다.그러나 그냥 달렸다. 혹부리 할아버지가 못 따라올 만큼 멀리 가서야 덕재에게 엉덩이를 돌려 댔다. 밤가시 빼내는 게 더 따끔거리고 아팠다. 절로눈물이 찔끔거려졌다. 덕재가 불쑥 자기 밤을 한 줌 꺼내어 성삼이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성삼이는 새로 불을 댕겨 문 담배를 집어 내던졌다. 그리고는 이 덕재 자식을 데리고 가는 동안 다시 담배를 붙여 물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고갯길에 다다랐다. 이 고개는 해방 전전해, 성삼이가 삼팔 이남 천태부근으로 이사 가기까지 덕재와 더불어 늘 꼴 베러 넘나들던 고개다.성삼이는 와락 저도 모를 화가 치밀어, 고함을 질렀다."이 자식아, 그 동안 사람을 몇이나 죽였나"그제야 덕재가 힐끗 이쪽을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거둔다."이 자식아 사람 몇이나 죽였어"덕재가 다시 이리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성삼이를 쏘아본다. 그 눈이 점점 빛을 더해 가며, 제법 수염발 잡힌 입언저리가 실룩거리더니,"그래, 너는 사람을 그렇게 죽여 봤니"이 자식아! 그러면서도 성삼이의 가슴 한복판이 환해짐을 느낀다. 막혔던무엇이 풀려 내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농민 동맹 부위원장쯤 지낸 놈이 왜 피하지 않고 있었어 필시 무슨 사명을 띠고 잠복해 있는 거지"덕재는 말이 없다."바른 대로 말해라, 무슨 사명을 띠구 숨어 있었냐"덕재는 그냥 잠잠히 걷기만 한다. 역시 이 자식이 속이 꿀리는 모양이구나. 이런 때 한 번 낯짝을 봤으면 좋겠는데, 외면한 채 다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성삼이는 허리에 찬 권총을 잡으며,"발명은 소용 없다, 영락없이 넌 총살감이니까, 그저 여기서 바른 대로 말이나 해봐라."덕재는 그냥 외면한 채,"발명은 하려구도 않는다. 내가 제일 빈농의 자식인데다가 근농군이라구해서 농민 동맹 부위원장이 됐던 게 죽을 죄라면 하는 수 없는 거구, 나는예나 이제나 땅 파먹는 재주밖에 없는 사람이다."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어,"지금 집에 아버지가 않아 누웠다. 벌써 한 반 년 된다."덕재 아버지는 홀아비로 덕재 하나만 데리고 늙어 오는 빈농군이었다.7년 전에 벌써 허리가 굽고 검버섯이 돋은 얼굴이었다."장가 안 들었냐"잠시 후에,"들었다.""누구와""꼬맹이와."아니, 꼬맹이와  거 재미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아,키는 작고 똥똥하기만 한 꼬맹이, 무던히 새침데기였다. 그것이 얄미워서덕재와 자기가 번번이 놀려서 울려주곤 했다. 그 꼬맹이한테 덕재가 장가를들었던 것이다."그래, 애가 몇이나 돼냐""이 가을에 첫애를 낳는대나."성삼이는 그만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제 입으로애가 몇이나 되느냐 묻고서도, 이 가을에 첫애를 낳게 됐다는 말을 듣고는우수워 못 견디겠는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작은 몸에 큰 배를 한아름 안고있을 꼬맹이. 그러나, 이런 때 그런 일로 웃거나 농담을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하여튼 네가 피하지 않구 남아있는 건 수상하지 않아""나두 피하려구 했었어. 이번에 이남서 쳐들어오믄 사내라 사낸 모조리 잡아 죽인다구, 열일곱에서 마흔 살까지의 남자는 강제루 북으루 이동하게 됐었어. 할 수 없이 나두 아버질 업구라두 피난 갈까 했지. 그랬더니 아버지가 안 된다는 거야. 농삿군이, 다 지어놓은 농살 내버려 두구 어딜 간단 말이냐구. 그래, 나만 믿구 농사일루 늙으신 아버지의 마지막 눈이나마 내 손으로 감겨 드려야겠구, 사실 우리같이 땅이나 파먹는 것이 피난 간댔자 별수 없는 것두 아니구...."지난 유월달에는 성삼이 편에서 피난을 갔었다. 맘에 몰래 아버지더러 피난 갈 이야기를 했다. 그때, 성삼이 아버지도 같은 이야기를 말을 했다. 농삿군이 농사일을 늘어놓구 어디루 피난 간단 말이냐. 성삼이 혼자서 피난을갔다. 남쪽 어느 낯선 거리와 촌락을 헤매 다니면서 언제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늙은 부모와 어린 처자에게 맡기고 나온 농사일이었다. 다행히그때나 이제나 자기네 식구들은 몸성히들 있다.고갯마루를 넘었다. 어느 새 이번에는 성삼이 편에서 외면을 하고 걷고 있었다. 가을 햇볕이 자꾸 이마에 따가웠다. 참, 오늘 같은 타작하기에 꼭 알맞은 날씨라고 생각했다.고개를 다 내려온 곳에서 성삼이는 주춤 발걸음을 멈추었다.저쪽 벌 한가운데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허리를 굽히고 섰는 것 같은 것은 틀림없는 학 떼였다. 소위 삼팔선 완충 지대가 되었던 이곳,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그 동안에도 이들 학들만은 살고 있는 것이었다.지난달 성삼이와 덕재가 아직 열두어 살쯤 났을 때의 일이었다. 어른들 몰래 둘이서 올가미를 놓아 여기 학 한 마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단정학이었다. 새끼로 날개까지 얽어매놓고는 매일같이 둘이서 나와 학의 목을 쓸어안는다, 등에 올라 탄다, 야단을 했다. 그러한 어느 날이었다. 동네 어른들의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서울서 누가 학을 쏘러 왔다는 것이다 그 길로둘이는 벌로 내달렸다. 이제는 어른들한테 들켜 꾸지람 듣는 것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네 학이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숨돌릴 겨를도 없이 잡풀새를 기어 학 발목의 올가미를 풀고 날개의 새끼를 끌렀다. 그런데,학은 잘 걷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동안 얽매여 시달린 탓이리라. 둘이서학을 마주 안아 공중에 후쳤다. 별안간 총소리가 들렸다. 학이 두서너 번날개짓을 하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맞았구나. 그러나 다음 순간, 바로 옆풀숲에서 펄럭 단정학 한 마리가 날개를 펴자 땅에 내려 앉았던 자기네 학도 긴 목을 뽑아 한 번 울음을 울더니 그대로 공중에 날아 올라, 두 소년의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저 쪽 멀리로 날아가버리는 것이었다. 두 소년은 언제까지나 자기네 학이 사라진 푸른 하늘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다."예, 우리 학 사냥이나 한 번 하구 가자."성삼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덕재는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내 이걸루 올가미 만들어 놀게, 넌 학을 몰아오너라."포승줄을 풀어쥐더니, 어느 새 성삼이는 잡풀 새로 기는 걸음을 쳤다. 대번 덕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걷혔다. 좀 전에, 너는 총살감이라던 말이 퍼뜩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성삼이가 기어가는 쪽 어디서 총알이 날아오리라.저만치서 성삼이가 홱 고개를 돌렸다."어이, 왜 맹추같이 섰는 거야 어서 학이나 몰아오너라."그제서야 덕재도 무엇을 깨달은 듯, 잡풀 새를 기기 시작했다.때마침 단정학 두세 마리가 높푸른 가을 하늘에 큰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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