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의 용서로 우울증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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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예수님이 주신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다는 건 여간 복된 일이 아니다.나는 1987년 스물일곱살 때부터 기자생활을 했는데,서른두살 때인 92년 가을부터 1년반 가량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94년 어느 봄날 주님께서 주신 ‘하룻밤의 기적’같은 체험을 잊지 못하고 있다.어느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의 60%가 노이로제,신경증,우울증 더 나아가 정신분열증 등 크고 작은 정신과적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우울증을 ‘그저 기분이 우울한 상태’ 정도로만 이해했다간 큰 코 다치기 쉽다.내게 우울증은 먼저 불면증의 형태로 찾아 왔다.당시 나는 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몇달 앞두고 집권당 대통령후보인 김영삼 민자당 대표를 담당하는 정치부 기자였다.새벽마다 상도동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가 YS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일을 했는데 밤이고 낮이고 “내가 의식하는 한” 단 10분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100여일 지속됐었다.밤엔 째깍거리는 시계바늘 소리에 신경이 쓰여 도무지 잠을 못잤고,낮엔 메마른 식물마냥 어떤 의욕적인 활동도 할 수 없었다.불면증에 이어 나를 방문한 불청객은 ‘대인공포증’과 ‘자율신경 실조현상’이었다.시청각,후각 등 주변세계를 인지하는 능력이 떨어져 사물에 대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었다.예컨대 내 감각으론 저만치 거리에 꽃이 떨어져 있는 것같아 손을 뻗으면 엉뚱한 것이 만져지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사람을 정면으로 쳐다보면 괜히 두려웠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더듬거리기 일쑤였다.단 한줄의 기사를 쓰는 것조차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회사의 배려로 나는 내근부서인 편집부로 자리를 옮겼고 고교 동창생인 신촌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의사는 ‘기자생활에서 쌓인 만성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진단했다.그는 ‘자살하지 말 것,이사하지 말 것,사표를 쓰지 말 것’등 우울증 치료과정에서 환자가 지켜야 할 세가지 수칙을 제시했다.실제로 편집부 시절 나는 회사 옥상에 직접 올라가 ‘살짝 한번 뛰어 내리면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질텐데…’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하나님의 뜻이었을까.“아무 교회라도 꼭 나가라”는 어머니의 강권에 못이겨 우연히 동네의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됐다.분당교회였는데 송풍호 목사님과 조순애 사모님은 매주 화요일마다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상담을 해주셨다. 두 분은 아무런 신앙적 기초도 없는 나에게 눈높이 말씀을 전해 주셨다.그 중에 ‘불뱀에 물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가 높이 든 놋뱀을 쳐다보자 그 자리에서 치유됐다’는 이야기와 ‘말씀이 생명이고 빛’이라는 요한복음이내 마음 속에 남았다.그러나 그뿐,병세의 차도는 없었다.목사님 부부는 내게 숙제를 하나 주셨다.매일 성경을 한장씩 써보라는 것이었다.그런 숙제를 꼬박꼬박 한지 1년쯤 됐을까.94년 4월의 어느날 밤이었다.요한일서를 옮겨적는 가운데 ‘네가 지금 어둠 속을 걷고 있는데,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네가 네 형제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내용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이 대목에서 평소 한번도 제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지인 두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그들은 각각 돈과 자존심 문제로 내 마음 속에 상처를 줬던 사람들이었다.사실 나는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런데 그들이 과거 내게 입혔던 상처의 사건들이 생생한 영화장면처럼 허공에서 재현됐다.결국 내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내가 그들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그러자 그들에 대한 증오의 감정에 내 스스로가 결박됐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순간 ‘형제에 대한 미움’에서 자유로워져갔다.눈물,콧물이 뒤범벅돼 내 생애 처음으로 회개와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다음날 아침,세상의 모든 것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1년반 동안 내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우울증은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치유된 것이다.‘형제에 대한 용서’가 바로 치유의 묘약이었다.그날부터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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