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부패 척결책의 하나로 꼽는 것은 ‘윗물 맑기’이다．김영삼 전대통령이 언젠가 ‘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은 윗물인데,돈 안 받고 칼국수만 먹지만 아랫물이 반드시 따라주는 것도 아니다’고 개탄하는 말을 들었다．‘윗물 맑기’ 해결책이 꼭 맞는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척결책의 다른 하나로 꼽는 것은 대기업 종업원 수준의 공무원 처우 개선이다．우리 나라의 부패는 공무원에 한하지 않는 총체적 부패이며,생계형 부패만이 아니므로 이 또한 결정적인 것이 못된다．따라서 위 두 가지만을 금과옥조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문제 해결책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생각건대우리의 생활관행에 부패의 요인이 잉태되어 있어,긴 안목에서는 이의 청산이 근본 해결책이라 본다．문제의 생활관행 열 가지를 들어본다．첫째,군중대회 방불의 손님 모으기 관혼상제 문화이다．월수입 1백만원인어느 분이 부부 둘이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으나 잦은 관혼상제가 문제라고 한숨 짓는 것을 보았다．우리처럼 이 때문에 생계비가 쪼들리는 나라는 없을 것이며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부패지수 상승의 요인이 아닐 수 없다．우리네 관혼상제는 실질적인 뇌물을 전달하는 기회로도 악용된다．둘째,우리의 회식문화도 문제이다．상사가 부하의 사기 진작용으로 회식하는데,이것이 유관기관에 손 벌리는 명분이요,출장비 일용 잡비에서 전용하는 등으로 회계 부정의 요인도 된다．더치페이하는 나라에서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셋째,자녀 과보호로 과외비의 과다지출 관행이 문제이다．중견 공무원의 말이 과외비만 없으면 월급 갖고 살겠는데,그 3분의 1 정도 나가는 과외비 때문에 힘들다는 것이다．부패 유발의 결정적인 요인이므로 역대 정권마다 해결시도를 한 바는 있다．넷째,연(緣)을 좋아하는 생활관행이다．학연 지연 혈연 이외 직(職)연,군(軍)연,종(宗)연등 6연이 성행한다．무리가 있어도 ‘우리가 남인가’ 운운하며 의리로 보아 주고,의리로 보답하는 부패의 고리가 형성된다．다섯째,청탁 풍토이다．인사,세금,공사,인허가,수사·재판 등 각종 이권에 청탁이 판을 친다．줄서거나 법에 따른 해결의 시도보다도,권력·인맥을 배경으로 청탁한다．물론 로비 과정에는 금품이 오고 간다．변호사 아닌 자가 돈 받고 로비하면 법의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여섯째,선물·촌지 문화에 문제가 있다．추석·설 등 명절에 갈비짝,상품권 등 과다 선물과 촌지가 오고 간다．캐나다 큰 업체의 공장장인 친구 말이자기 회사에서 가장 크게 하도급받는 회사 한 군데에서만 성탄절에 10달러짜리 위스키 선물을 하더라고 했다．하지만 우리 중앙부처 총무과장에게는 간단히 설에 1천8백만원까지 촌지 봉투가 쌓였다는 것이다．일곱째,셈의 불투명이다．잘된 회계장부가 없으며,거스름의 명쾌한 결재가 드물다．장부,영수증을 깐깐히 챙겨 감사하면 인정머리없는 사람으로 매도된다．경리 부정,분식결산,최고 통치권자가 ‘통치자금’으로 받았다는 돈인데 통치 끝난 후에 돌리지 않는 작태 등은 이 때문이며,후보자가 선거자금10억원을 썼다면,불과 2억∼3억원이 유권자에게 전달될 뿐 나머지는 운동원 착복의 풍토도 우연이 아니다．여덟째,준법정신의 실종이다．법을 지키면 손해본다는 생각인지 잘 지키지 않는다．범법·무질서는 상납 문화 형성의 원인이다．인천 화재사건의 호프집 주인이 법을 어긴 바 없었다면,상납의 가랑비를 뿌릴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아홉째,과다한 행정규제와 특혜문화가 문제이다．시장경제와 자유경쟁의 원리가 뿌리내리지 못하고,국가가 국민을 가부장적으로 지배하는 전통이 남았다는 증좌이다．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로,규제 또한 부패로 연결되는 법이다．조세감면,저리 대출,보조금 등 국가의 특혜가 많다 보니 로비도 왕성해지는 것이다．열째,부패에 온정적 정서가 문제이다．우리 사회에 부패사범은 득실거리지만 처벌이 없고,독일처럼 통독의 영웅 콜까지 법의 철퇴에서 예외를 두지 않는 냉혹함은 없다．이상으로 보아 냉철한 이성보다는 가슴만 뜨거워,인정에 쉽게 영합하는 情(Pathos)의 문화가 팽배해 있다．깊은 반성과 과감한 청산에 민·관의 적극 동참을 제의한다．/전 감사원장·경희대 법대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