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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커 박사의 리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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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커 박사의 리더론(논)은 현대의 조직, 특히 기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는 로마와 같은 고대국가에도 그대로 정의된다. 로마가 로마다울 수 있는 또다른 이유 역시 로마를 로마답게 만들고자 했던 로마시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마다운 로마'가 무엇인지를 제시한 지도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그러한 지도자로는 시오노 나나미씨가 로마제국 천년의 역사 동안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평가하는 케사르를 비롯해 로마왕정을 종결하고 공화정을 출범시켰던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2차 포에니전쟁의 중반에 등장하는 스키피오 장군 등이 포함된다.<>리더는 미래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리더는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대중에 한발 앞서 미래에 살면서 미래로 가는 길을 이끄는 사람이다. 드러커 박사가 리더의 두가지 유형 중 하나로 예언자를 꼽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로마사에서 케사르의 경우도 그랬다. 케사르는 원로원을 중심으로한 공화정의 한계를 일찌감치 간파, 이를 넘어선 새로운 왕정체제의 가능성을 보았다.<>리더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케사르가 원했던 것은 로마의 평화였다. 로마시민의 복지였다. 그러나 케사르는 원로원파처럼 권력 유지를 위한 평화와 복지를 추구하지 않았다. 최고권력자가 된 케사르에 대해서 빈민들의 기대가 컸다. 왜냐하면 케사르는 민중파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간주돼 왔기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32만명의 빈민에게 공짜로 밀을 나눠줬다. 호민관이었던클로디우스가 가난한 유권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케사르는 집권 후 이같은 복지정책에 과감한 개혁을 시도한다. 공짜로 밀을 받는 사람을 15만명으로 줄였다. 이의 엄격한 시행을 위해 안찰관을 배치했다. 세대주의 소득과 가족수 등을 엄밀히 조사해 꼭 보조가 필요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스스로 일하여 먹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케사르가 자기시대의 권력유지에 집착했다면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음 세대를 위해 `일하는 로마', `일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리더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코린트는 아테네, 스파르타에 이어 그리스 3대 도시국가의 하나였다. 이 도시는 700여년간 번영을 누렸다. 그런데 코린트는 기원전 146년 로마인에 의해 철저히 파괴됐다. 그리스의 높은 문화를 존중한 로마인은 시종일관 그리스 민족에 대해서는 독립과 자치를 인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점에 대해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 그리스인은 로마의 그런 태도를 그리스 문화에 열등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코린트 시민들은 코린트를 방문한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 무례하게 행동했고 이에 격분한 로마인은 관용을 버렸다. 그리고 로마는 철저하게 코린트를 파괴했다.그리스인은 과거의 성공에 취한 나머지 자신들의 현재를 보지 않았다. 적어도 코린트에 그들의 현실을 읽을 줄 아는 리더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노예가 되는 비참한 역사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리더는 먼저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역사에서 무력만으로 계속 성장했던 나라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때 그리스를 제패, 에게해의 강자로 떠올랐던 스파르타. 하지만 스파르타는 패권을 유지할 통치철학을 갖고 있지 못했고 머지 않아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이에비해 로마인들이 갖고 있던 정신적인 토대는 로마가  `세계제국'이 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로마사회를 지탱했던 정신 덕목 중 하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 Obize)'였다. 로마인들은 저지대에 놓인 습지라는 불리한 환경을 기반으로 타민족과 끊임 없는 전쟁을 통해 외연을 확장했다.이 과정에서 로마인들에는 국가가 `레스 퍼블리카', 즉 `공공의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들은 국가를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공 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먼저라고 믿었다. 공직에서는 사람은 모두가 10여년 정도의 군무를 통해 지도자의 책무를 체험했다.<>리더는 정신자본을 축적해야 한다로마사회를 뒷받침했던 또다른 사회규범은 신뢰(Fieds)였다.로마에는 특이한 사회제도인 `파트로네스(Patrones)'와  `클리엔테스(Clienntes)'의 관계가 존재했다. 파트로네스는 후원자를, 클리엔테스는 피후원자를 말한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평민들과 클리엔테스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은 평민들에게 경제적이고 가정적인 문제에 대해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클리엔테스는 자신들의 파트로네스인 귀족들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헌신적인 자세로 일했다. 귀족들은 베풀었고 평민들은 보답했다. 그리고 이러한 베풂과 보답은  `신뢰'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있었다. 요컨대 로마와 로마의 지도자들은 로마사회를 신의의 기반 위에 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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