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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선구자 아타나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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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295∼373)는 니케아 공회(325)에서 결정된 신앙고백의 신실한 추종자요,삼위일체교리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그는 불신자 부모 밑에서성장했으나 일찍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알렉산더의 총애를 받아 30세의 젊은 나이에 그의 수행 비서로 니케아 공회에 참석했다.수년 후 감독이 세상을 떠나자 아리우스 무리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32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책임지는 감독에 취임했다.그러나 그는 아리우스와 모종의 절충을 시도하려는 정치가였던 콘스탄틴 황제와 유세비우스의의도대로 두로 공회의 결정에 의해 335년 감독에서 물러났고,트리어로 첫 번째 유배의 길을 떠났다.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 공회가 정죄한 아리우스를 교회로 다시 받아들이라는 황제 콘스탄틴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분명 황제 자신의 소집과 참석 하에 아리우스를 정죄했던 니케아 공회의 결정을 뒤로 한 채 아리우스 일파들을 다시금 용인하는 콘스탄틴의 태도를 수긍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그들 일파에 의해 주도된 두로 공회 자체의 법적 정당성과 결정을 받아들일 수없었기 때문이었다.결국 아타나시우스의 니케아 신경을 위한 투쟁은 아리우스 일파를 대적한 싸움과 맥을 같이 하게 됐다.콘스탄틴이 죽고 353년 콘스탄틴 2세가 즉위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황제가 니케아 공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자들을 국가 공권력을 동원해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335년 또다시 막막한 이집트 광야로 유배된 아타나시우스는 금욕주의적인애굽사막의 수도자 ‘성 안토니의 생애’를 저술했다.이것은 체험적 고독을 통한 저자 자신의 추구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전기적 작품이기도 하다.이제 아타나시우스는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쟁취하고 니케아 신경의 확고한 정립을 위해 싸우는 상징적 저항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그러던중 콘스탄틴 2세의 갑작스런 죽음과 이에 따른 급격한 정치적 상황의 변화는 아타나시우스를 승리자로 만들었고,동시에 니케아 공회의 결정이야말로 교회의 승리한 신앙의 표지로 인식되었다.그의 남은 과업은 아리우스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니케아 신경에 보다 신학적으로 체계를 부여하는 일이었는데,무엇보다도 성부와 성자는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사실을 견고히 하는 일이었다.아타나시우스의 전 생애에 걸친 추구는 성령을 포함한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적 정립으로 나아가게 됐다.5회의 유배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의 삼위일체 교리는,그가 세상을 떠난 8년 후 콘스탄티노플 공회(381)를 통해 결실을 보았다.곧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을 향한 확고한 삼위일체적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을 선포했으며 “비두니아의 니케아에 모였던 318명의 감독들의 신앙고백은 무효화시켜서는 안되며,마땅히 유효하다.그리고 모든 이단사설은 정죄되는데 그들은 아리안파와 반아리안파”라고 확정하면서 아타나시우스의 오랜 투쟁을 종결시켰다.후대는 아타나시우스를 신학자로,그리고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을 추구한 탁월한 교회정치가로 평가하며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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