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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의 피아노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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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라는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깊이 모를 짙푸른 물 까마득히 출렁대는 바닷가에 영혼의 문을 두드리듯 울려퍼지던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을.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섬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소록도이다. 소록도는 천형의 땅이다. 애써 한센병이라는 낯선 병명을 기억해야 할 만큼 조심스러운 상처의 터전이다. 언젠가부터 그 섬에선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듣는 이의 영혼을 흔들리게 하는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그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김기상 씨이다. 소록도에 어느 마음 따뜻한 이가 피아노를 보내왔다. 하지만 누구도 피아노를 칠 수가 없었다. 밥숟가락을 들 손가락도 없는데 피아노를 칠 손가락이 따로 남아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죽어가는 나뭇가지처럼 어느 날 그렇게 뚝뚝 부러져버리는 손가락들, 산 채로 몸이 썩어가는 고통과 괴로움. 그 절망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진 피아노에서 누구도 위안의 음악을 끌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김기상 씨가 자신이라도 쳐보겠노라며 나섰다. 소록도에서 만난 같은 병을 앓는 여자와 서로 상처를 핥아주며 살던 그에게 남은 손가락은 두 개. 그는 그 손가락 두 개로 띵똥거리며 흑백의 건반을 눌러나갔다.그는 검은 건반에 숱한 날들의 캄캄한 어둠의 기억을 싣고, 순백의 건반에는 그래도 차마 놓지 못한 희망과 그리움들을 실었다. 말더듬이의 첫마디처럼 정성스러운 노랫소리를 그렇게 하여 소록도의 허공 가득 풀어놓았다. 그 소리는 이내 안개처럼 소록도에 스며들었다.그 후 아무리 오래 눈감고 있어도 찾아와주지 않는 잠의 빈자리를 메우던 허망한 파도의 철썩거림 대신 소록도 거주민의 귓전엔 밤이면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고즈넉이 들려오곤 했다. 뒤척거리며 눕는 그들의 아픈 자리마다 음표 하나가 먼저 누워 그들을 따뜻이 맞아 잠재워주곤 하는 것이다. 그 음표들은 저마다의 꿈속에서 또 그렇게 깜박이며 어둠을 잘라내는 별로 떠올라, 소록도의 밤하늘에는 오늘도 별이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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