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슈바이처 안순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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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대륙에서 일곱 아내 거느리고 추장처럼 지냈습니다”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31년 동안 의료봉사활동을 해온 안순구 박사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잠시 귀국했다.원주민들을 치료하면서 부족의 명예촌장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특이한 삶을 만나보았다.나는 아프리카에 미친 사람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다가 31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안순구 박사는 아프리카 생활을 이 한 마디로 회고했다. 올해 나이예순둘. 일생의 꼭 절반을 검은 대륙에서 보내고, 이제 내년 1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일산 자택의 대문을 열어주고 마당을 걸어들어가는 안박사의 첫 모습에서는 까만 맨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랜 아프리카 생활에 길들여진 습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안박사는 인구 3만 명인 테살시에서 유일한 테살 병원의원장이다. 30여 년 동안 그의 손으로 받아낸 생명이무려 2만여 명. 한국에서의 전공은 내과였지만 여기서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몸이 아픈 사람 누구나 그를 찾아온다.그는 1968년, 부인 이명숙씨와 함께 정부의 아프리카의료지원계획에 따라 이곳에 왔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아프리카에서의 대북 외교우위를 위해 의사들을 파견했던것이다. 카톨릭 의대를 졸업하고 막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끝낸 그는 세 살과 한 살 난 딸을 한국에 남겨두고몇 달씩 걸리는 뱃길에 올라야 했다.처음 그가 아프리카 땅을 밟았을 때의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했다. 의료시설이 제대로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주술과 민간요법만으로 환자를 치료하다가 위험한 일이 종종 일어났다. 독한 악어 쓸개를 약으로 먹여 사람이 죽는 경우도 빈번했다.코트디부아르는 적도에 면한 서부아프리카 국가. 기후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우리나라와는 질병의 종류도 달랐다. 그는 열대성 질환들을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현지 병원에서 2년간 열대의학 특별 연수를 받았다. 환자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진료를 다닐 때마다 각 부족 말을 하는 통역관 3명을 대동해야 했다. 처음에는 현지인들의 반응도 냉랭해, 동양의 이방인을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가 복통을 낫게 하고, 말라리아로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공무원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기 때문에 3년을 채운 뒤 얼마든지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에 계속 남는 쪽을 택했다. 슬슬 현지 사정에 적응하면서, 뭔가 이루어놓고 돌아가겠다는 포부가 생긴 것이다. 부인이씨 역시 안박사를 뒷바라지하면서 미국 평화봉사단과 함께 그곳 사람들에게 재봉, 뜨개질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씩, 10년씩 늘어난 봉사기간이 어언 30년이 됐다.원주민들은 안박사를 ‘빠빠’(아빠) 또는 ‘세프딜라지’(촌장)로 부른다. 실제로 그는 떼살 시의 두 부족 명예촌장에 추대되었다. 한국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족의 축제나 장례식 등의행사에는 촌장의 자격으로 참여해 그 부족 추장과 나란히 앉으며, 매주 금요일에는 족장회의에 참석하여 부족의대소사를 의논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그는 부족 내에서 어느새 거물이 되어, 의사이면서 국회의원이나 법관 자리를 겸직하고 있는 셈이다.그는 아내가 일곱이다. 한국에서 결혼해 아프리카로 함께건너간 이명숙씨가 ‘본처’고, ‘현지처’가 여섯 명.신의를 맹세하고 존경을 표하는 풍습에 따라 부족 처녀6명을 아내로 상납받은 것이다. 마을 잔치에서 찍은 여섯 부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는 “얘들이 내 마누라 들이야. 미인이지” 하고 껄껄 웃는다. 그 지역 관례라지만 기분나쁘지 않았냐고 부인에게 물었더니 웃으면서 대답한다. “괜찮습니다. 일부다처제인 아프리카에서도 조강지처의 권력은 막강한걸요.”아무리 추장급의 대우를 받는다 해도, 의사로서의 보장된인생, 가족과의 단란한 행복 대신 오지 아프리카에서 고생하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박사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한국의 의사야 돈은 많이 벌겠지만, 그곳에서만큼의 보람과 명예는 맛볼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그야말로‘의사다운 의사’ 대접을 받은 것이 큰 이유다. 아무리 고소득을 올려도 이곳의 의사가 직업인일 뿐이라면, 거기서는 부모 이상의 존경을 받더라는 것이다.아프리카에서는 각종 전염병과 풍토병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끼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당연히 의사와 주민의 관계가 밀접할 수밖에 없다. 안박사는 그곳 사람들 사이에 각종 민원을 상담해주는 해결사이기도 하다. 호적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원주민들이 학교에 갈 때가 되면 영구치를 살펴 나이 확인을 해준다. 요즘은 마을들을 순회하며 청소년 에이즈 예방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그의 아프리카 생활이 길어진 것은 타고난 성향이 아프리카 사람들과 맞았던 탓도 크다. 손익을 따지기보다는 정에 끌리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기질. 그는 스스로 ‘아프리카 체질’이란다.“원주민들이 미개하다고 무시할 수 없습니다. 순수한 사람들이고, 정이 살아 있어요.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아프면 온 식구가 호롱불을 밝혀든 채 환자를 들쳐업고 20km나 되는 길을 걸어서 병원을 찾아와요. 진한 가족애가 예전 가난하던 때의 우리나라와도 많이 닮았죠. 또그곳에는 스트레스가 없어요. 그저 밭에서 나는 것들을따다 먹고, 넓은 땅위에 쉴 곳 있으면 그만이니까요.남들이 좀 잘 산다싶으면 아둥바둥 쫓아가는 욕심, 질투, 그런 것 때문에 우리네 삶이 피곤해지잖아요. 아프리카에선 음악이 흘러나오면 어디서건 춤추고 노래합니다.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삶에 반했죠.”그는 다만 가족들에게 불성실했던 데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말한다. 31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함께한 부인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7번이나 되고,세 딸과는 교육문제로 평생을 떨어져 지냈다. 딸들은 외가에서 자라 각각 프랑스로 유학해서 학업을 마쳤다.장녀 민선씨는 소르본에서 국제법을 전공하고 있고, 둘째래용씨는 피아니스트, 막내 민정씨는 프랑스 대사관에서근무하는 재원들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자란데다 개인을 중시하는 프랑스 교육을 받아 세 딸이 모두 독립적인 성격이라고 한다.평생 봉사하는 삶에는 분명 대단한 사명감이 요구된다.하지만 안박사는 사명감만으로는 아프리카에서의 고된 생활을 버텨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즐거운 마음,괴로운 일이 있어도 늘 웃고 극복하려는 자세가 있었기에 30년씩이나 이국에서 남들을 위해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안박사 부부는 주거니받거니농담을 해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의 회고담에서 묻어나는 것은 거창한 희생정신보다는 삶과 사람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었다.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코트디부아르로떠난 안박사 내외는 2000년 1월에 완전히 귀국할 계획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살려 후학들을 위한 열대의학서를 펴내는 것이 안박사의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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