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부장판사의 유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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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신문 사회면에서 상큼한 기사 하나를 보았다.부장판사의 유언장이었다.그는 “만약 불의의 사고로 뇌사판정이 날 경우 장기를 기증하고,남은 육신은 화장하며 재산의 3분의1 이상은 반드시 이웃사랑과 환경보호에 써달라”고 했다.주인공은 정해남 부장판사였다.문득 21년전 군대 내무반이 떠올랐다.그와 나는 20대중반의 쓰라린 시절을 잠시 공유했었다.고시를 합격못한 채 버티다가 병역문제 때문에 장교후보생이 되었던 것이다.촌사람 같은 인상을 풍기던 그는 내무반 구석에서 정물같이 묵묵했다.간염에 걸려 허약했던 내게 훈련은 고통이었다.10분간 휴식이 허용되면 기진맥진한 채 연병장 바닥에 쓰러졌다.만사가 귀찮았다.그때 그의 특이한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몇 분이라도 틈이 생기면 몰래 책을 꺼내 읽었다.그 이후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부터 시작해서 엄청난 양의 책을 소화했다.모두들 훈련에 지쳐서 돌아오면 그는 내무반 바닥을 청소하고 추운 겨울에도 찬물로 몸을 닦았다.그리고는 취침시간 전이면 성서를 꺼내어 읽었다.밥을 먹어야 하듯 그는 책을 읽어야 존재할 수 있는 사람같았다.전해 들리는 소리로 그는 중학교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했다고 한다.그는 군복무 중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됐다.나도 그 후에 합격이 되어 변호사가 되었다.이번에는 그와 법정에서 재판장과 변호사가 되어 만났다.그는 빈틈없는,성실한 법관이었다.기록의 글자 한자도 소홀하지 않았다.산적한 사건 속에서도 당사자의 말을 놓치지 않았다.경험을 통해 얻은 넓은 이해,방대한 지식,법률가로서의 치밀한 전문성을 모두 갖춘 지혜로운 재판관이었다.나는 그가 대법관이 되면 철학이 담긴 판결문이 나오리라고 확신했다.한달 전이었다.재판을 마치고 법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그와 마주쳤다.그가 물어볼게 있다며 차를 한잔 하고 가라고 권했다.“나 사표내려고 해요.법원퇴직금으로 사무실이 될까”그가 물었다.“법원을 지키면서 우리 사회의 저울과 자가 돼야할 분이 무슨 그런 소리를…” 내가 말렸다.그는 일류였다.실력뿐만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겸손을 가졌기 때문이다.일류 판사는 여러 사람의 쓰라린 눈물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그렇지 않은 판사도 있다.그들의 냉정한 법정에서는 권위주의가 흐른다.얼어붙은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 조차 모른다.법지식과 판례에 따르면 책임을 완수했다고 단정한다.지혜로운 판관이 법정을 꼭 지켜야 한다.“나도 책읽고 싶고 애들이 공부하도록 돈도 대주고 싶어” 법관보다는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은 게 그의 소박한 꿈이었다.그는 후배 법관들에게 이런 글을 남기고 법원을 떠났다.“법관으로 봉직했던 지난 15년동안 매달 수백 건의 사건을 정신없이 처리하면서 내심 소송관계인의 애타는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 늘 죄를 짓는 심정이었습니다”그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상담객이 밀린다는 소문이다.그에게 개업축하 전화를 걸었다.“돈 욕심을 버리는게 변호사 잘하는 길 같네…” 변호사가 된 그의 첫 마디였다./엄상익 변호사(법무법인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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