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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목사와 신앙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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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목사가 64세이던 해 1938년 어느 날, 종로 경찰서 소속 고등계 형사 한 명이 숭동교회 사택으로 그를 찾아와 말했습니다."김목사님은 왜 동방배례가 우상숭배라고 설교하십니까""동쪽의 일본신사를 향해 절하는 것이 어찌 우상숭배가 아니라 하시요""그렇지 않소이다. 국민된 의례를 따라 동쪽을 향해 머리를 숙이라는 것이지 우상을 경배하라는 것이 아니외다.""어찌됐든, 우리 예수교 신자들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절하지 않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일이 올시다.""상부의 지시로 전하는 것이니 아무튼 황국신민의 도리로 신사에 참배하기를 바랍니다.""우리 예수교 신자들은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뿐입니다. 이를 어기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외다.""나로서는 상부의 명령을 어길 수 없는 일입니다. 훌륭하신 목사님께서 괜시리 고집을 피우시다가 봉변을 당하실까 염려가 되어 하는 말입니다.""세상에서 벌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릴 수는 없소이다."고등계 형사의 회유와 협박에도 김익두 목사는 이미 각오가 되어있음인지 매우 분명한 어조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일본형사는 더 이상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음인지 매우 불쾌한 기색을 띠고 본서로 되돌아 가버렸습니다.그가 되돌아간 다음 주일에도 김익두 목사는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결코 신사참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수일이 지난후, 종로경찰서의 고등계 형사가 다시 찾아와 말했습니다."목사님, 서장님이 한번 뵙자고 하시는데 바쁘시더라도 함께 가셨으면 합니다."이 말을 듣고 김익두 목사는 마음 속으로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생각하고 가족들에게 간략한 부탁의 말을 남기도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종로경찰서는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악명 높은 곳입니다. 안명근 사건 때 105인의 우국지사들을 참혹하게 고문했던 곳이며 독립운동가, 애국지사들에게 이루 말할 수없는 고통을 주어 원한의 대상이 된 경찰서이기도 합니다.이곳에 연행되어온 김익두 목사는 무쇠도 녹아 나간다는 악명 높은 고문실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잔인한 고문과 악형으로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육신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결코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일경들의 고문 방법은 매우 잔인하고 가혹했습니다.목검(木劒)을 가지고 그의 몸을 사정없이 치기도 하고 목검이 부러지면 쇠몽둥이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온몸이 피로 물들고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고통을 못이겨 수차례나 혼절(昏絶)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경들은 바켓츠에다 찬물을 가득 담아와서 그의 얼굴에 퍼부어 정신이 들게 했습니다.그러나 그는 정신이 들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주여! 고통 때문에 실언할까 두렵사오니 종의 입술을 지켜주소서."그는 자신의 육체가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육체의 고통을 못이겨 일본제국주의자들 앞에 신앙의 절개를 굽혀 하나님께 범죄할까 그것을 염려했습니다.일경들의 잔인한 고문은 거의 매일같이 계속되었습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 참나무를 끼워 손가락이 으스러지도록 비틀기도 하고, 대나무를 뾰쬭하게 깎아 만든 표창으로 그의 손톱 사이에 끼우고 사정없이 찌르기도 했습니다. 어느 때는 물에 고추가루를 태워 강제로 코에 붓기도 하고, 어느 때는 넓적한 널판지에 그를 눕히고 얼굴에 보자기를 씌운 후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면 코에 물이 들어가 금방 숨이 막힐듯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런 혹독한 고문으로 몇번씩이나 까무러치고 실신해 버렸고 그의 전신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살은 찢어지고 온몸을 시퍼렇게 멍이 들어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이 되어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의 육신은 모진 고문으로 말미암아 시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의 일선에서 헌신한 그에게 이러한 육체의 고난은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시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러나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지금 받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이 모든 고난을 감내했습니다. "이제, 신사참배를 할 수 있겠소"종로경찰서장은 한달 가까이 가혹한 고문을 계속했음으로 천하의 김익두 목사도 별수없이 굴복하리라 믿고 득의만만한 얼굴로 이죽거렸습니다."절대로 못하오. 절대로."김익두 목사는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지독한 독종이다!"마침내 서장은 그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육체적인 고통만으로는 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최후통첩을 했습니다."당신은 이제부터 목사가 아니외다!. 그러므로 당신은 결코 숭동교회에서 설교를 해서는 안되오!""설교권을 누가 주었는데 당신이 하라, 하지마라 하는게요""듣기 싫소! 이미 숭동교회에도 그렇게 통고했으니 속히 서울을 떠나시오.""목사직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당신이 무엇인데 나보고 그만 두라는 게요"김익두 목사는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엄청난 무력 앞에서 더 이상 그의 말은 아무런 효력도 나타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김익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강요에 의해 목사직을 빼앗기고 숭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수일이 지난 후 종로경찰서로부터 김익두 목사를 데려가라는 통보가 가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부인과 성도들이 종로경찰서로 숨가쁘게 달려가 김익두 목사의 신병을 인수하고 보니 이미 그의 몸은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들어보았으나 겨우 희미한 호흡을 하고 있을 뿐이었고 맥박마저 고르지 않았습니다.김익두 목사를 실은 달구지가 숭동교회 정문으로 들어오자 기다리고 있던 많은 성도들이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을 보고 모두가 슬픔과 분노를 못이겨 눈물을 흘렸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의 옷을 벗기고 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온몸이 피멍이 들어 시퍼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의사의 지시를 따라 안정을 시키기 위해 따뜻한 방에 눕히고 정성껏 치료를 했습니다. 5일이 지나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고 13일째 되어서야 겨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못했습니다.1938년 12월 28일. 일제의 강제 파직으로 목사직을 박탈 당한 김익두 목사와 그의 가족들은 정든 숭동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일경들의 감시와 압력으로 더 이상 숭동교회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아직 몸도 회복되지 아니한 불편한 몸을 수레에 싣고 마치 귀양가는 사람처럼 외로운 길을 떠나 머나먼 황해도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엄동의 12월 말에 머나먼 길을 떠나 황해도 은율군 직전리 어촌 마을의 소박한 초가집에 짐을 풀었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이곳 뒷동산 후미진 곳에 큰 바위를 기도처로 삼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 바위에서 1945년 조국 광복의 날까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하루 세번씩 기도를 했는데 새벽, 낮, 밤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에 광명한 빛을 보내주소서. 언제까지나 이 어두움의 세월을 보내야 하옵니까!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려 주시고 이 나라 이 민족에게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나라와 민족을 위한 그의 기도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7년 동안을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였는지 때로는 비를 맞으면서도 기도를 계속하여 옷이 흠뻑 젖는 것 조차 몰랐다고 합니다. (울산 평강교회 이동휘 목사 설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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