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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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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의 만행이 남긴 상처와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소개하겠습니다.<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나눔의 집'의 광복 52주년은 착잡하기만 하다. 다리지체 장애와 양쪽 눈 실명 등 중복 장애로 고생하는 김완암(81)할머니가 지난 11일부터 "도깨비들이 모여들어서 무서워 못살겠다."고 호소하며 수면장애와 함께 치매증상을 보이기 시작 한 것이다. 빛의 방향만 간신히 구별할 정도인 김할머니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도깨비들이 보인다며 잠도 안자고 소리만 지르자 '나눔의 집' 식구들 모두 비상이 걸렸습니다. 너나할것 없이 비슷하게 고령과 노환으로 시달리는 할머니들에게 김할머니의 증상이 남의 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10명이었던 '나눔의 집'할머니들은 지난 2월 강덕경(1929∼1997)할머니가 저세상으로 떠난 후 9명으로 줄었다. 강할머니의 사망 이후 '나눔의 집' 최연소할머니가 된 김복동(73)할머니는 누구보다 할 말이 많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일본정부의 사죄를 받고 배상도 받고 죽을 거야.일본 정부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러놓고 50년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없다가 민간 위로금으로 입을 막겠다니 말이 돼 단돈 한푼이라도 정부에서 줘야지. 우리 할머니들 다 죽도록 기다리는 것밖에 더돼"><러시아의 동쪽끝에 길게 자리잡은 사할린섬에는 해방 52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완전한 해방이 찾아오지 않았다.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피맺힌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4만여명의 우리 동포들에게 해방은 완료형이 아니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진행형일 뿐이다. "50여년을 고국, 고국하다가 다 늙어 버렸어. 하지만 단 하루를 살다가 눈을 감는 한이 있더라도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겐 진정한 해방이지. 뼈만이라도 고국에 묻어야 그나마 한이 풀릴텐데…." 사할린의 州都(주도) 유주노 사할린스크의 한인 노인회에서 만난 이진우(81)할아버지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의 귀국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1944년 일제에 강제징용을 당해 한탄과 한숨속에 보낸 한서린 망향 50여년의 세월이 금방이라도 폭포같은 눈물로 변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사할린 동포의 영구귀국과 임시귀국 방문업무를 보고 있는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에는 고국에 가기를 갈망하는 동포들의 여권과 신청서가 상자에 빽빽이 담긴채 쌓여있다. "고국에서보다 더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어도 이방인인 내가 마음껏 숨쉬고 맘편히 안주할 땅은 결코 아냐. 내가 태어난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어." 고향이 충남 당진이라는 윤구병(80)할아버지. 이산가족협회에서 만난 그는 지금도 어린시절을 보낸 고향언덕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은 한국으로 영구귀국을 신청해 놓고 이제나 저제나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사할린 이산가족협회에 따르면 한국의 적십자사가 주관하고 있는 올해 영구귀국 신청자는 모두 2백23명...>중국은 과거 일본 731부대 상대로 첫 집단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모 일간지에 보도된 그 소송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소장에서 일본군이 지난 42년 충산촌에서 자행한 세균전 만행을 당시 기록과 함께 상세히 고발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그 해 가을 충산촌에 페스트균을 살포해 많은 주민들이 페스트에 감염됐다. 일본군은 세균전의 효과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충산촌 인근에서 생체해부를 자행했다. 당시 18살이었던 우샤오나이는 많은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채로 배가 갈리우면서 신장과 폐가 적출됐다. 그의 비명은 당시 산사를 진동시켰다. 일본군의 생체실험이 진행된 현장에서는 사지가 잘리우고, 장기가 없어진 사체들이 주민들에 의해 목격됐다. 일본군은 생체실험이 끝난 뒤 충산촌에 방화를 했다. 당시 페스트균에 오염돼 숨지거나 생체실험에 희생된 충산촌 주민은 4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이들은 밝히고 있다. 도쿄 지방법원에 간 희생자 대표인 허잉전(63·후난성 창더시)은 눈물을 흘리며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당시 18명이던 우리 집안은 형님과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 형수 등 모두 6명이 페스트균에 감염된 뒤 생체해부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며 풍비박산이 났다." 허치원(66)은 일본 공군이 투하한 세균탄으로 부친이 경영하던 음식점 직원 18명 가운데 14명이 페스트에 감염돼 죽었고, 결국 음식점도 불타버렸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일본군이 중국에서 세균전을 자행한 것을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당시 관련기록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731부대의 세균전 자행과 관련한 중국 민간차원의 첫 소송인 이번 집단 소송은 배상 요구액이 10억8천만엔(약 939만달러)에 달한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세균전 관련 배상을 요구한 적은 과거에도 있었다. 충산촌 주민 수백명은 지난 94년에도 일본 대사관에 배상을 요구하는 연합 소장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정부는 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결국 이들의 요구는 묵살됐다.>그 악명 높은 731부대란 무슨 짓을 했습니까<이시이 시로 일본 육군 군의중장의 이름을 따 '이시이 부대'로 불리기도 하는 731부대는 일제 세균전 부대의 본대격이다. 세균전의 필요성를 역설한 이시이의 건의에 따라 1935~36년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으로 창설된 일제 세균부대는 모두 4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얼빈 인근의 '관동군 방역급수부'라 불렸던 731부대를 비롯해 창춘 인근 멍자둔의 `관동군 군마방역국'이라는 100부대, 일명 `에이'라는 난징의 1644부대, 일명  `나미'라는 광둥의 8605부대가 그것이다. 이들 부대들은 일제의 세균전 연구책임자인 이시이가 직접 부대장으로 근무한 731부대를 중심으로 합동작전과 연구를 진행했다. 731부대는 이 부대에서 인체실험 대상자로 희생된  `마루타'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3천여명의 병력을 거느린 731부대는 모두 8개 부서로 구성됐다. 1부는 페스트, 콜레라균 등 각종 전염병균에 대한 연구를 중점 실시해 300~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에 수감된 마루타들에게 세균실험을 자행했다. 2부가 이들 세균을 사용하는 실행부서였다. 제4부인 생산부는 말 그대로 병균과 세균을 대량생산하는 부서였다.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에서는 1940년 이후 매년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 대상이 돼 최소한 3천여명의 중국 러시아 한국 몽골인이 희생된 것으로 소련의 일제전범재판 결과 드러났다. 이 재판에서 731부대 관계자들은 마루타 감옥이 만들어진 뒤 살아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731부대는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지난 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대해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실제로 살포한 것으로 드러났다.>일본은 인류 역사에 저지른 이 엄청난 과거의 죄악을 하나님 앞에 회개치 아니하면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울산 평강교회 이동휘 목사 설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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