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의와 분노
본문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었고 또한 당신의 원의를 우리에게 전달하시었다. 당신이 친히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써 항상 우리를 일으켜 주시었던 것이다. 그 가장 큰 예로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함은 당연한 것이며 그 앞 시대의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기실 예언자는 단순히 주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확성기가 아닌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위에서 오는 영감을 거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자신의 기질 때문에 일어나는 소용돌이에도 또한 저항하지 않았다. 하여 우리는 예언자의 언행을 이해함에 있어서 내면에서 솟구쳤던 주관적인 내적 작용과 아울러 외적 접촉을 통한 솟구침을 통한 예언자의인식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바 예언자의일이란 하늘이 어찌 보는가를 전하여 알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도역시 인간이기에 그 자신이 하나의 관점이다. 그는 자신의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눈으로 본 하나님의 관점으로 말한다. 우리는 그가 풀어설명해 준 하늘의 관점을 이해하려 함과 동시에 그가 한 말의 사적이고 내면적인 차원, 그가 전한 메시지의 주관적인 측면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바로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목소리로 굴절되어 울려 퍼져 왔기 때문이다.우리는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갖는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이며 인류 창조 이래로 가져 오셨던 당신의 원의를 알 수 있을것이다. 또한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고 행하여야 하는지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이제 아모스라는 한 인물을통하여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원의를 헤아려 보고 아울러 미래에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실 당신의 뜻과, 때문에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것들을 말하여 보고자 한다.본론아모스가 활동하였던 당시의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당시의 이스라엘이 타민족의 억압을받는 시대가 아니요 정치, 경제적으로 '개화'하는 시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로보암의 시대에 이르러 히브리 민중사는 새로운 시점에 접어든다. 이민족의 지배가 끝나는 시점에 접어든 히브리 민중은 이제 새로 형성될 민족 공동체가 지배층과 피지배 계층으로 갈라지는 관계에접어들게 된 것이다. "여로보암2세의 눈부신 통치가 오래 계속되는 동안(약 786~746 B.C.) 이스라엘 왕국이라고 불리는 북왕국은 물질적인국력과 재물을 최고도로 유지하였고 국경은 북쪽으로 하맛과 다마스커스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유다와의 경계에 이르렀다. 이 시절에 아시리아는 쇠약하였고 시리아는 무너져가는 도중이었다. 여로보암은 이두 나라가 약세에 놓여 있는 틈을 타서 국경을 확장시켰고 상업을 발전시켜 부를 쌓았다. 하지만 그의 나라에는 물질적인 부가 있는 대신정의가 없었다. 그 대신에 교만과 사치와 그리고 거짓된 풍요가 있었다. 부자들은 비싼 상아로 만든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갖고 있었다, 비단 베개가 있는 화려한 침대 위에서 음탕한 향연을 벌렸다. 아모스가 바산의 암소들이라고 부른 여자들은 술에 취해 있었으며 아름다운 포도원과 값진 향유를 몸에 바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질타하셨던가 군사적, 정치적 승리에 의한 자기 도취, 번영의 세대가 낳은 안일무사주의, 짓밟힌 사회 정의와 사직 당국의 불의,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신례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을 때에 이웃 나라들도 역시 그분의 비난을 피하지는못하였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이웃 백성들을 처단하시는 분이 아니며 야훼께서는 공정한 심판관이시기 때문이다. 에돔은 "동기간의 정을 끊고 칼을 겨누었으며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모두 버리고 끝내 미워하여 앙심을 품었다". 시리아는 "쇠꼬챙이박힌 타작기로"길르앗 사람들을 학살하였으며 가자와 블레셋 사름들이사람들을 포로로 삼아 돈 몇 푼을 벌기 위하여 그들을 노예로 팔아 넘긴 사실을 묵시항디 않았다. 이 모든 야만스런 행위는 다민 증오심을만족시켜 줄 뿐이었다(아모스서 1:3~2:3). 야훼의 저주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었다.주 야훼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뜻에 거슬리는 자에게만 손을 드시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국가 내의 사건과 아울러 국가 외의 사건에까지 당신의 비난이 퍼부어졌던 것을 알수 있다. "그 선대의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 종교를 거부하고 야훼 종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바알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세벨과 아합을 지원하는 신인 데 비해 야훼는 이를 심판하는 신이기때문이었을 것이다. 신의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회 정의 실천 여부가 종교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모스에 이르러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기 기만에 빠져 있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들이 비판받았던 것 이유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여러 제국이 범한 죄악의 공통점은 바로 약한 자들을 박해하였다는데 에 있다. 그리고 연약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만행이 그 처벌의이유가 되고 있다., 그들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은 이스라엘뿐만아니라, 암몬과 아람인들의 희생이 된 길르앗 사람과, 펠리시데 사람들의 마각에 짓밟힌 사람들과, 모압인들의 제물이 된 에돔 왕까지 포함되어 있다".과연 당시의 이스라엘에 퍼부어졌던 아모스의 외침이 지금의 우리시대에는 어떻게 들릴 것인가. 당신의 말씀을 끊임없이 실천하여 그이루어짐을 끊임없이 지향하여야 할 우리는 이제 구약 시대의 그 사건을 과거로 돌릴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에게도 비추어보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물론 당시의 그 질타를 오늘의 시점에서 비교,검토해보는 작업은 쉽지 않고 또한 짧지도 않을 것이지만 이 글에서는 다만간략하게나마 국내적인 차원에서와 국외적인 차원,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인용, 언급해 보고자 한다.국외적인 차원: "선진 자본주의의 침투는 남미의 여러 나라들에대해 정치적 지배 없이 경제적 예속을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선진 부강 국가의 자본 경제의 도입으로 민족 자본이 부족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선진국에 경제적으로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종속 이론이 나옵니다. 선진국들은 후진국에 경제적 원조를 해준답시고 원료 기지화를 했고, 소모품 또는 상품 시장화를 했고, 자본과 기술의 전매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피원조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신판 식민지가 되어서 착취와 가난에 시달리고, 계속해서 선진국의 경제예속을 탈피할 수 없는 종속 관계를 초래케 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제국주의적 종속이라고 얘기되는 현상입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정치적 종속, 더 나아가면 학생들이 요즘 얘기하고 있는 문화적 종속, 그리고 군사적 종속까지도 불가피해질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과연 자본주의의 보급이 지탄받아야 할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함에있어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실지로 식량 수출국인 인도에서 그리도 심한 기아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과 대부분의 제 3세계 국가들이 실지 국가가 지닌 능력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장을 보이지 않고있을 뿐더러 오히려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볼 때에 누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는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희생으로서 고통을 받음이 아니요, 선대에 지은 죄값으로 고통을 받는 것또한 아닌 것이다. 돈 몇 푼을 받기 위하여 이민족을 노예로 팔아 버린 가자와 블레셋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비추여짐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며, '국경선'을 넓히기 위하여 길르앗의 임신한 여자들을학살한 암몬의 모습이 비추여짐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비록 다른 모양이고 다른 형태이지만 같은'내용'으로 이 지구 안에서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국내적 차원: "브라질의 유럽화 혹은 재유럽화와 함께 옛 억압체제-노예와 종에 대한 주인의 억압,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유럽 문화의 대리인이라고 여기는 자 들, 즉 아프리카인과 원주민에 대한 지도적 도시 주민들의 억압이 강화되었다.도시의 거리를 질주할 권리는 관리와 군인, 그리고 유럽 스타일의 옷과 구두를 착용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제3세계의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정부가 강력한 실력자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습니다.정치는 민중이 접근할 방법이 없는 딴 세상입니다. 정치 경제와 사회문화 분야의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없으면 정의 없는 개발, 다시 말하면 거짓된 개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우리 나라의 예로서는 단순히 농촌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해 보고자 한다. 일면 얇은 예이고 작은 부분일 수도 있지만 구조적인 차원에서 한 전형을 보인다고 믿는다."70년대의 유신 체제에서 그 논의를 농촌 정책에 국한시킬 때 가장 실패작으로 꼽는 것이 이른바 '취락 구조개선 사업'이었다고 지적하는 소리가 높다. 농촌의 현지 실정을 무시한 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내는 '전시 행정의 어이없는 졸작'으로 이루어진 것이야말로 취락구조에 대한 것이었다는 지적이다.""우리는 지난 70년대에 '근대화'라는 것은 농촌의 농민을 도시로유입시켜 노동자가 되게 함으로써 생산성이 낮은 농업을 희생시키는한이 있더라도 산업화, 도시화를 일으켜 고도 성장을 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다. 농촌의 해체화, 농민의 분화는 이제 도시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농촌 자체에서도, 그리고 농촌 거주자들 속에서 일어나고있는 중이다. 필자가 두 번에 걸쳐 답사한 갑을면 에서는 최근 세 번의 도둑질이 자행되었다. 아예 고속도로를 타고 봉고나 트럭을 몰고와서 상점, 정미소, 주택 가릴 것 없이 '샅샅이 이 잡듯이' 물건들을뒤져내고 가축들 마저 몰아 잡아 가지고 가버려서 현지 주민들은 '닭좇던 개'처럼 멍청해 하고 있다. 도시의 '비만증'과 농촌의 '파괴'는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진정서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 ㆍㆍㆍ중략 ㆍㆍㆍ저희들이 알기에는 이와 같은 극독 위험물을 생산하는 공해 업소는 따로 공해 단지에 설치하던가 아니면 완전 공해에 피해가 없을 오지에 설치하여야 될 터인데인가 부근(10미터 인접)및 농경지 인접 지역에 설치되었음은 무리가아닌지 궁금 하오며, 황산 제조 공장에는 어떤 공해 방지 시설을 설치하여도 완전 공해 배제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와같은 극독 위험물을 생산하는 공장 설치 시에는 인근 주민들의 동의가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들은 또한 아무도 동의한 바 없읍니다. 그리하여 피해 발생 시마다 수 차 공장 측과 당국에 호소한 즉 개선 조치하겠다고만 말할 뿐 개선은 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날이 갈수록 자연 환경이 완전 황폐되어야 설치 기준 위반이 되는 것인지 저희들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기이한 것이니 다른 공장들은 주간은 물론 야간까지 완전 가동을 하고 있는데 이 공장은 어찌 된 일인지 주간에는 쉬고 있다가 주로 야간에만 완전 가동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필시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을 은폐하고 당국의 조사를 불가능케 하려는 저의가 숨겨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일로서 악덕 기업의 면모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ㆍㆍㆍ중략ㆍㆍㆍ끝으로 각하의 만수무강하심과 의도하시는 모든 일이 신의 가호아래 모두 성취되시기를 기원합니다".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개인으로 있을 때에는 그 각 개인에게뿐이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의 각 구성원들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의 연대책임을 피하지 못하며 그것은 각각의 공동체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인 것이다. 우리 나라를 구성하는 공동체 상호간에 있어서도 역시이는 마찬가지이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의 현 사회가 공동체 상호간의 충분한 의견 교환으로 구성되지도, 나가지도 않는 현 시점에서우리 사회 역시, 그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의 예언자 아모스의 질타를 피하기엔 어려울 것이라고 믿는다.결론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주 야훼께서는언제나 당신의 사자를 통하여 우리게 당신의 뜻을 알려 오셨다. 성서사의 예언자, 수많은 순교자, 증거자 등이 그 예일 것이며 그 정점에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전달자의 역할을 이제 교회가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왔고 또한 그분이 직접 세우신 것이며 세상 끝날 까지당신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위임받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교회의 위상과 역할이 세워졌으며 지금까지 내려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것이다. 그리하여 교회가 스스로 소망하고 사명으로 하는 일, 성신의인도로 그리스도 자신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특징을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각각의 시대와 각각의 사회의 특징이다루고 그것을 교회가 복음의 빛으로 탐구하고 해명해 줄 방향이 그원리는 하나이지만 역점은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 교회의 사명과 선교적 노력은 한 마디로 인간을비인간적 상황으로 몰아넣는 요인들에 대한 인간화와 부르짖음이며 그에 대한 요구로부너 출발되어지고 있다."우리가 성서에서 뵙는 하나님은 해방시키는 하나님이다 ,조작된신화와 발호하는 세도를 쳐부수는 하나님이다 역사 속에 개입하여 불의의 체계를 파괴하는 하나님이며, 정의와 자비의 길을 가르치라고 예언자들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이다. 우리가 성서에서 뵙는 하나님이니노예를 해방(EXODUS)하는 하나님이요, 제국들을 무너뜨리고 압제받는이들을 들어 높이는 하나님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끊임없이내세우면서 그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에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배려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복음 전편에서 흐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빈궁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표해야 한다는 요구가 성서 전편에 가득차 있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설교가 압제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라는 말씀이 아니었던가"먼 옛날 구약 시대의 아모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드러내보이고 요구하였다. 그의 분노가 서린 곳곳마다 우리는 지금의현실을 비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옛날의 말씀이 아니라 주 야훼의말슴이 진리이며 더불어 영원하다는 것을 증거키 위하여 우리 교회는행동하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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