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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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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 일어난 민비 살해 사건(을미사변)의 발단은 이렇습니다.(프레데릭 맥켄지가 <대한제국의 비극>에서)미우라 코로오는 직업 청부 깡패 둘을 은밀히 불러 거사를 설명했습니다. 이번 거사를 위하여 벌써 군과 경찰도 동원 계획을 세운 터였습니다. 두 깡패 아다찌 겐조와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불량배 24명을 모아 행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살해 특공대였습니다. 미우라 코로오는 약 한 달전에 조선의 공사로 부임한 자며 구리토모 시게아리카는 황성신문사 주필이었습니다. 일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가 코로오 공사와 대원군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이리하여 조선에서 기울어가는 일본의 영향력를 회복하려는 코로오와 민비를 꺾고 집권하려는 대원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3시쯤 대원군의 집이 있던 시골, 오늘의 마포 공덕동에서 대원군과 일본인들이 출발했습니다. 행동대는 그날 새벽에 쉽게 왕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이 궁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본 정규군은 궁을 차단하여 지켰습니다. 살해조 깡패들이 왕의 침소가 있는 곳의 담을 넘었습니다. 곧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약간의 조선인 수비대는 사살됨으로써 곧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깡패들 일부는 고종의 침소로 들이닥쳐 고종을 위협했습니다.민비와 이혼하겠다는 문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민비 살해조는 왕비의 침소로 뛰어들었습니다. 깡패들은 도망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두들겨 패면서 왕비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모르겠다고 말하며 애원하는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끌고 옆방으로 가던 살해조는 방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살해조 조장인 일본군 고문 오카모도 류노스케가 그 여인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제끼면서 왕비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이를 부인하면서 몸을 홱 뿌리치며 비명을 지르며 낭하로 도망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세자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는 모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해조가 민비를 덮쳤습니다. 여러 명이 쓰러진 작은 여인을 난자했습니다. 칼에 피가 튀었습니다. 모든 일은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살해조는 아직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왕비를 이불에 둘둘 말아 멀지 않은 정원 마당으로 옮겨 던졌습니다. 그 위에 석유를 붓고 준비한 나무를 주위에 쌓았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계속 석유를 부어댔습니다."모든 것이 다 타고, 그리고는 몇 조각의 뼈만 남았다."기울어 가는 나라, 그 슬픈 나라의 '국모'는 이렇게 죽었습니다. 민비가 살해되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고종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밖에 기독교인 누구 없느냐!"기독교는 그 때 그 가련한 왕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습니다. 그 무서운 위기의 때에 왕은 기독교가 필요했습니다. 고종의 외침은 1800년대의 마지막 15년 동안에 한국 사람이 기독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당시에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앞잡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기독교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벌써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침략국이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들도 기독교를 '어렵고 위험한 때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종교'로 보았던 것입니다. (울산 평강교회 이동휘 목사 설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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