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예화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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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예화자료
† 말없이 사랑하여라
말없이 사랑하여라.
내가 한 것처럼 아무 말 말고 자주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잠자코 사랑하여라.
사랑이 깊고 참된 것이도록 말없이 사랑하여라.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봉사하고 눈에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을 하여라.
그리고 침묵하는 법을 배워라.
말없이 사랑하여라.
꾸지람을 듣더라도 변명하지 말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네 마음을 사랑이 다스리는 왕국이 되도록 하여라.
그 왕국을 타인에 대한 자상한 마음으로 채우고 말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사람이 너를 가까이 않고 오히려 멀리 떼어놓아 따돌림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오해를 받을 때 말없이 사랑하여라.
사랑이 무시당하는 것을 참으면서….
네 침묵 속에 원한이나 인내하지 못한 마음, 또는 심한 비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여라.
언제나 형제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도록 마음을 써라.
네 원수를 친구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네게 무관하고 낯선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될 것이다.
네 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네 마음에 받아들이라.
하나님께서 영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네게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이다.
너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을 초청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게 하늘 영광문을 넓게 여실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오 / 한태완
†사랑의 작품
사람들 중에는 모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줄자형이 있다.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망치형도 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기만 하는 실톱형이 있다. 달라고만 하면서 쥐어짜는 바이스형도 있다. 괴퍅한 성질을 부리면서 우리의 성질을 갈아대는 그라인더형이 있다. 지나간 자리에 벤 자국을 크게 남기는 도끼형도 있다. 일관성 없이 흐느적거리는 연체동물형이 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두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모난 부분을 깎아내시고 거친 부분을 다듬으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작품을 만들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일보다 우리의 인격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계신다.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 인내를, 인내를 통해 인격을, 인격을 통해 소망을 이루는 작업을 하신다(롬 5:3∼5). 하나님은 까다롭고 못된 사람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멋진 사랑의 '큰 작품'으로 만들어가시는 것이다.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 나의 사랑, 나의 생명
지금은 탄광에 환기장치가 잘 되어 있어 큰 위험이 없지만 예전에는
메탄가스 폭발사고가 많았다.
안심하고 일하기 위해서는 누적된 메탄가스를 새벽에 태워버려야 했다.
파이어 맨(불 붙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젖은 두꺼운 옷을 입고 긴 나무 막대기 끝에 불씨를 켜서
누적되어 있는 가스를 태운다.
이는 가스가 어디까지 퍼져 있는지 냄새로만 판단하면서 굴에
들어가기 때문에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
그것은 모든 광부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갈릴리 십자가에 파이어 맨으로서 매달리셨다.
가스에 덮인 탄광처럼 죄에 덮인 인간들의 죄악을 불태워 없애기 위하여
자신을 태운 것이다.
예수를 생각하면 오직 감사의 눈물이 흐를 뿐이다.
오직 예수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편해진다.
‘주여, 당신만큼 참아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만큼 빼앗겨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만큼 멸시를
받아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신만큼 외로워해본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분의 마음을 내 마으로, 그분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할 수 있다면,
그분의 행복도 나의 행복으로 삼을 수 있지 않겠는가?
참으로 당신은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여, 나는 약하여 한 순간도 당신 없이는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포옹은 부드럽고 당신의 오른손은 힘이 있어 나를
만족게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지 마소서.’
명상록 / 최효섭
† 손가락 하나에 담긴 큰 사랑
어느 간호사가 쓴 수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모녀가 정형외과를 찾았다. 60이 넘어 보이는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며 자신의 왼손을 내놓고 넷째 손가락을 잘라 달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이끌려온 듯한 어린 딸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딸의 왼손을 잡고 원장에게 애원했다. “제 딸이 초등학교 때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가락 다섯 개가 다 잘렸습니다. 다행히 네 손가락은 접합 수술에 성공했는데 하필이면 네 번째 손가락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딸이 이번에 시집을 갑니다. 못생긴 제 손가락을 딸에게 줘 가락지를 끼워 주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딸은 말도 안 된다며 펄펄 뛰었지만 의사는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수술 후 처지가 바뀐 모녀는 서로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수술을 도왔던 간호사는 이 모녀의 ‘손가락 사랑’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새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손가락 하나의 사랑도 이럴진대 온몸을 다 주신 예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요.”
양병희 목사<영안장로교회>
† ‘빈집’마다 사랑의 불을 켜자
요즈음 미분양으로 불 꺼진 아파트가 속출하고 있다. 여기에 서울 강남의 업무용 빌딩 공실률도 사상 최고치에 가까운 12%를 넘어섰다. 이는 IMF 때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빈 아파트와 사무실이 증가한다는 것은 전반적인 부동산 경기하락, 혹은 버블이 꺼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삶이 고달프며 팍팍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불은 켜져 있지만 사랑이 없고, 가족은 있지만 마치 불 꺼진 집처럼 적막한 가정이 늘어가고 있는 점이다. 소설가 김주영씨는 응집력을 찾아 볼 수 없는 가족들의 쓸쓸한 삶을 ‘빈집’(문학동네)으로 그려내고 있다. 한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직업이 뭔지, 자식이 하루 종일 밖에서 도대체 뭘 하는지 모르는 이들의 집은 분명 ‘빈집’이다. 가족 간의 대화가 하루에 8분도 채 되지 않는 집은 ‘빈집’이다. 이런 집은 빨리 불을 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빈집의 참상’이 도래할지 모른다(마 12:45). 가정의 달이다. 불을 켜자. 사랑의 불, 대화의 불을 내 집부터 켜자.
옥성석 목사(일산충정교회)
† 사랑을 깨우는 마중물
마중물, 적어도 오십을 넘긴 세대에게는 추억을 되살리는 단어다. 땅속 깊이 고인 물을 퍼 올리기 위해 한 바가지의 물이 꼭 필요했다. 물을 마중하여 함께 온다는 뜻으로 마중물일 게다. 파이프 관에 부어진 마중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그 한 바가지의 마중물로 인해 깊은 곳에 잠자던 물은 어둠을 뚫고 콸콸 솟아 올라와 목마름을 해결하며, 대지를 적시고 생명체를 살린다. 그렇기에 마중물은 버려지는 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물도 아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한 바가지의 물, 즉 마중물을 청하셨다. 여인으로 하여금 마중물로 살아가라는 명령임에 틀림없다. 지금 모두들 한 바가지 마중물을 갈망하고 있다. 누군가 기꺼이 먼저 마중물이 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 잠긴 듯 고여 있는 사랑의 정수(淨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깊고 맑은 우물 자체이신 주님이시여! 일상(日常)의 우물가에서 초라한 바가지로 당신께 물을 길어드린 저로 하여금 이젠 목마른 사람을 향해 물 한 두레박을 나누는 마중물 되게 하소서.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성탄절에 오신 주님의 사랑
어느 시골 마을 교회에 인지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소년이 출석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이 아들이 행방불명됐다며 찾으러 왔다. 온 교인을 동원해 일일이 묻고 찾아다녔으나 없었다. 며칠 후 호수에 시신이 떠올랐다.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할 무렵 얼음판을 타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장례식에서 ‘지극히 작은 자’(마 25:40) 하나를 잘 돌보지 못한 죄를 회개하며 온 교인이 울었다. 동네 사람들도 가족과 함께 울었다. 그리고 그 눈물들이 소문이 되어 전도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요즘 등하교 길에서 장애를 가졌거나 공부를 못하는 이른바 ‘루저’ 아이를 ‘잘난’ 학생들이 따돌리고 때리며 그 광경을 동영상으로 찍어 즐긴다니 한심하다. 하늘이 분노할 이런 ‘컴피티션(Competition·경쟁)’ 세상을 치료해 살릴 길은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컴패션(Compassion·긍휼)’과 사랑이다. 성탄에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 하셨다.
서재일 목사(원주영강교회)
† 자기 사랑
이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진정한 자기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야 자기를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심문받을 때 가장 가까이 따라갔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곳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운명하시기 전 했던 부탁으로 혈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모셨다. 그가 바로 사도 요한이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박해받던 중 기름 가마에 던져졌으나 기름이 그를 해하지 못했다. 밧모섬에 유배된 그는 그곳에서 앞으로 될 일과 천국의 비밀을 알리는 계시록을 기록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요새 삼고 그분을 위해 자기가 죽고자 하는 행위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1)
권태진 목사(군포제일교회)
† 하나님, 그 변치않는 사랑 우리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보다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보다는,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거대한 아프리카대륙에 있는 한 마리 코끼리의 꼬리에 붙은 모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께 요구할 때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치 우리의 의견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 양말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대여해 준 세상을 오염시킵니다. 당신이 준 신체를 학대하고 혹사시킵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 온 당신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빼앗고, 발로 차고, 짜증을 내고, 욕을 하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상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포기할 만한 이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습니까? 저는 떠오르는 태양에서, 부서지는 파도에서, 어린아이의 피부에서 그 답을 느낍니다. 비록 우리가 당신을 냉대하고, 무시하고, 불복종할 지라도 당신은 결코 변치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악은 하나님의 사랑을 감소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선은 그것을 증대시킬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서 우리를 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성공한다고 해서 우리를 더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영원보다 더 오랫동안/맥스 루카도
<pre>† 놀라운 사랑 개와 고양이가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둘은 서로의 사진을 편지로 교환한 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서로가 설레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아름답게 꾸미고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멀리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서로가 너무나 실망해서 만나지도 않고 돌아서 버린 것입니다. 고양이는 꼬리는 내리고 다가갔는데 이 모습은 고양이가 반갑고 즐거울 때 하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개는 반가울 때 꼬리를 세우고 흔듭니다. 그래서 개가 꼬리를 올리고 흔들면서 다가가자 고양이는 개가 자기를 반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실망했고, 개 역시 자기를 향해 꼬리를 세우지 않는 고양이를 보고는 실망했습니다. 그 둘은 서로의 표현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구유에 태어나심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으로서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이기심으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주심으로 소망 없는 인생에게 참 소망을 주셨습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요한복음 3:16 )</pre><pre> † 사랑의 기본</pre><pre>남자가 청혼을 했다. 여자는 망설였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여자는 말했다. "나랑 같이 살면 각오해. 당신을 확 뜯어고칠 거야." 그 뒤 신부가 과연 신랑을 자기 마음에 들게 잘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신부가 제일 먼저 고쳐야 했던 것은 신랑을 전면 개조하겠다는 그 마음가짐이다.
둘이 한몸 되어 사는 부부관계는 상대방을 고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품고 사는 것이다. 미국의 윤리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처럼 변화시킬 것은 변화시키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구분하며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가 상대방 속에 계신 주님을 보고 존중해야 한다. 휴대전화 벨소리 바꾸듯 상대방을 대하면 안된다. 끝까지 인격적으로 예우해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견디는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13:4∼7).
서재일 목사(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pre><pre> </pre><pre>† 사랑이란 </pre><pre>상담자와 내담자 간에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더 이상 감정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내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없다면, 그 때문에라도 아내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사랑이 감정만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을 때는 사랑이 뜨겁고 기분이 나쁠 때는 사랑이 식는다. 사랑이 의지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꾸준히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되는가? 설거지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라. "여보, 사랑해!"라고 말해보라. 의지의 선택으로 사랑을 실천하다가 보면 자연스레 정이 든다.
사랑이 감정만이라고 생각하면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가정을 세운다. 사랑이 의지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 만세 반석 위에 가정을 세운다. 감정에 따라 흐르지 말고 의지에 따라 역류(逆流)하라. 그러면 세월과 함께 무르익는 사랑을 맛볼 것이다.
권성수 목사<대구동신교회> </pre><pre> </pre><pre>† 먼저 찾아온 사랑</pre><pre>신학대생 시절, 신학 공부가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기숙사 밖에 누군가 찾아왔다. 당시 조직신학을 가르치시던 고 박봉랑 교수님이 제자를 위해 심방을 오신 것이었다.
신학의 거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던 교수님이 먼저 제자를 찾아오셔서 위로와 새 힘을 불어넣어주셨다. 예수님을 모신 삭개오의 방처럼 내 기숙사 방이 거룩함으로 채워지는 듯했다. 기쁨의 눈물로 새 출발을 선포한 계기가 된 사건이다. 목회가 힘들 때마다 박 목사님은 먼저 내 마음속으로 찾아오셨다. 소천한 뒤에도, 가끔 꿈속에서도 나를 찾아와 어깨를 두드리시며 용기를 심어주셨다.
스승을 통해 나를 먼저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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