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들은 이야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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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들은 이야기 외
▣ 그때 들은 이야기
어느 사형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안 믿고 전도를 받아 들이지 않던 철저한 무신론자인데 사형 집행을 며칠 앞두고 목사님을 부르더랍니다. 그래서 제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이 찾아갔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고마운 마음에 어떻게 성경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며, 예수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회에 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민학교 다닐 때 교회에 가면 상준다고 해서 친구들 따라서 몇번 가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들은 이야기를 아무리 지워 버리려 해도 지워 버릴 수가 없고, 그 이야기는 죽음을 며칠 앞둔 이 시간에 내 마음을 꽉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공자에게 안회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제자가 32살로 세상을 떠날 때에 공자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땅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랑하는 제3자와 함께 있을 때의 일입니다. 먼 길을 여행하는데 양식을 구하지 못한 공자 일행은 근 일주일이나 굶었습니다. 안회는 사방에 다니면서 식량을 구해와 밥을 지었습니다. 그 냄새가 너무도 좋아서 공자는 안회가 밥을 짓는 곳에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안회가 솥뚜겅을 열더니 속으로 ‘아,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내가 인의예지를 그토록 가르쳤는데 제가 먼저 먹어?’라며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래서 은글슬쩍 그런 내색을 비추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안회는 공자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솥뚜껑을 열고 보니까 얻어온 쌀이라서 그런지 수수가 몇 알 섞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밥을 스승님께 드릴 수도 없고,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제가 그것을 골라 먹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 때에 그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사람의 눈은 믿을 수 있는 것이지만 때때로 믿어서는 안될 때가 있다. 또 마음을 의지하고 살지만 내 마음도 내가 믿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믿어서는 결코 안될 때가 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내 의견은 옳고 남의 의견은 틀렸다는 것입니까? 믿을 만한 눈도 믿을 것이 못될 때가 있습니다. 내 판단, 내 지식, 내 마음도 더더욱 믿을 수 없을 때가 있기에 온유한 마음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러니 예수믿어
한국교회사에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그분이 저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기 경험을 말씀해주신 것 중에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김익두 목사님은 모내기 하는 사람들이 점심 먹는 데 찾아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그런데 한 젊은 청년이 나서서 “목사님, 이 마을에서도 전도해도 잘 안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으니, “며칠 전 비오는 날, 나무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불이 붙어서 그만 나무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또 바위에도 벼락이 떨어져서 바위가 깨지고, 논바닥에도 떨어져서 논바닥이 이렇게 패였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이렇게 하셨겠습니까? 논바닥이 무슨 죄가 있고, 바위가 무슨 죄가 있고, 나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은 돌아서서 “하나님,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자네는 국민학고에 다녔나, 서당에 다녔나?” “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국민학교 선생님의 손에 무엇이 있었던가?” “막대기가 있었습니다.” “그 막대기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때때로 흑판이나 책상을 치고, 그러는 것이지요.” “흑판이나 책상이 무슨 죄가 있나?” “아,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조니까 졸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아이들이 끝까지 졸면 어떻게 되겠나? 마침내 그 막대기가 아이들 머리위로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와 같이 벼락이 나무를 쳤고, 바위도 쳤고, 논바닥도 쳤다마는, 다음에는 사람들 머리에 떨어질 것일세.” “그것, 안되겠는데요.” “그러니 예수믿어.” 그래, 전도해서 교회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죠
어떤 어린아이가 자기 방에서 장난감 벽돌을 열심히 쌓으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들어가서 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이기 위해서 방에 들어갔지마는, 이 어린아이는 정신없이 벽돌을 많이 쌓아놓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뭘 하고 있는 거냐?" 이 아이는 돌아서며 하는 말이 "쉿, 아빠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중입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랬습니다. 아이를 교회에 데리고 갈 때마다 떠들기만 해서 아무 말씀도 못 듣고 오는 것 같고 믿음도 없는 것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그 만큼의 신앙심도 생긴 것 같고 해서 대견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거기서 말을 멈추었으면 좋았을 걸, 한 마디 더 물어보았습니다. "얘야, 교회에서는 왜 조용히 해야 되느냐?" 아이가 대답하는 게 걸작입니다. "아버지도 참! 교회에서는 조용해야죠. 사람들이 다 잠들어 있잖아요. 떠들면 깨잖아요." 아버지가 이 어린 애를 데리고 교회에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갈 때마다 졸고 앉았거든. 교회는 가면 자는 곳이다, 이렇게 이 아이에게 생각이 되었더라는 겁니다.
▣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수상인 모세 다얀은 그의 운전 기사에게 늘 친구처럼 대했다고 한다. 아침에 서로 만나게 되면 운전기사는 모세 다얀에게 “모세, 오늘 아침은 어떻소 ?”라고 마치 친구에게 하듯 인사를 해서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자 모세 다얀의 대답은 간단했다. “하나는 앞에 앉고 하나는 뒤에 앉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이 다른 것은 아니다.” --- 다시 말하면 나는 수상이요 저 사람은 수상의 운전 기사일 뿐 사람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란 말이다.
▣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노르웨이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소년이 숲속에서 놀다가 처음 보는 이상한 새알 하나를 주웠습니다. 소년은 이 알을 가져다가 자기집 거위가 품고 있는 거위알틈에 넣었습니다. 얼마 후에 알은 다같이 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상한 알에서 나온 새는 부리가 뾰족하게 생겼고, 깃털은 검은색입니다. 이 검은 새는 흰 거위새끼들을 따라 뒤뚱뒤뚱 걸르면서 함께 놀며 자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독수리가 나타나서 저들을 위협합니다. 어미거위는 빨리 피하라고 난리를 칩니다. 거위새끼들은 뒤뚱거리면서도 잘 도망가는데, 검은 새는 날갯죽지가 커서 빨리 도망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뒤뚱거리다가 급한 김에 날개를 쭉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휭’하고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그 새는 독수리 새끼였던 것입니다. 독수리였으나 거위 속에서 거위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큰 바람을 맞고, 또 위기에 들어서서는 자기의 본모습이 드러나면서, 훌쩍 시원하게 날아오르는 독수리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자기를 아는 일
헬라 철학의 비조라고 하는 탈레스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 그는 대답하기를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쉬운 일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남을 충고하는 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 남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입니까 ?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벤저민 프랭클린이 서점을 경영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한 손님이 책방에 들어와 책들을 뒤져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이 책이 얼마입니까 ?” 라고 물었습니다. 1달러라고 프랭클린이 대답하자 손님은 “조금 싸게 안됩니까 ?” 라고 흥정을 합니다. 이에 프랭클린은 “그렇다면 1달러 15센트를 주십시오” 라고 대답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손님은 “여보시오, 깎자는데 더 달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 라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천연스럽게 다시 “1달러 50센트입니다” 라고 값을 더 올려 부릅니다. 급기야 화가 난 손님이 따지고 덤빕니다. “왜 오히려 점점 더 비싸게 부르는 거요 ?” 프랭클린은 그 손님에게 대답합니다. “시간은 돈보다 귀한 것입니다. 왜 쓸데없는 말씀으로 남의 귀한 시간을 뺏는 것입니까 ?”
▣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사형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 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레닌그라드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
▣ 고백록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원래 시간에 대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치 못한 인식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에 예속된 현재가 있고, 현재에 속한 현재가 있고,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현재가 있을 뿐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기억일 따름입니다. 다만 과거에 속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미래도 그렇습니다. 다만 미래를 지향한 현재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동물과 같이 과거도 미래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현재에 예속된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
근대 실존주의사상의 선구를 이룬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든 예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가을날 따뜻한 지방을 찾아 떼지어 날아가던 철새들이 옥수수밭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내려앉아 쉬면서 옥수수를 쪼아먹었습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나서는 다시 그대로 날아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이렇게 먹을 것을 많이 두고 왜 날아가나’ 라고 생각하는 철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철새는 동료 새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그곳에 하루를 더 머물면서 배불리 옥수수를 더 먹었습니다. 날아간 새들은 모두 바보요 자신만이 똑똑하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많은 양식을 두고, 이 좋은 자리를 두고 구태여 멀리 가려고 하는 새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을 머물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다가와 찬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렸습니다. 결국 그 철새는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막살이 앞을 지나가는데 거기에 소녀 하나가 추운 겨울날에 문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서 있더랍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하고 물었더니 그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아버지가 나를 때리며 나가라고 내쫓아서 지금 문 밖에 서 있습니다” 하더랍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아버지께서 잠든 다음에 들어 가려고요” 어린 아이는 아버지가 잠든 다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고 새벽 일찍이 아침상을 준비해 가지고 아버지 방에 들어갔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때려서 내쫓았는데 너는 왜 오늘 집에 들어 왔으며 또 아침상을 차려서 가지고 오는 거야 ? 이 못난 아버지가 밉지도 않으냐 ?” 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더랍니다.
어째서일까요 ? 이 소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어머니가 세상 떠날 때에 내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기만 하면 저 모양이 된다마는 본심은 착한 사람이다. 언젠가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나는 너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런고로 너도 너의 아버지를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말씀이 참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그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아버지가 회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덴마크의 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말을 타고 시골로 사냥을 가면서 빈민촌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 시골길에서 그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습니다. 천사같이 아름답고 깨끗한 여인이었습니다. 왕궁에 돌아와서도 그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끝없이 생각나고, 그리웠습니다. 그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인에게 내 사랑의 진실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첫째 고민이었습니다. 둘째는 신분의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합니다. 신분의 격차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릴 수 있을까? 배우고 못배우고, 가난하고 부하고가 문제 안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의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하겠는데..... 그리고 세째로, 잘되고 못되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네째로, 어떻게 하면 그녀도 내가 저를 사랑하는 만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내 사랑을 받아들이게 하고, 저도 나를 사랑하게 할 수 있을까? 그는 이것을 고민했습니다. 물론 연구도 했습니다. 주변의 의견도 구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왕궁에서 입던 화려한 옷을 벗어버리고 그녀가 사는 시골 마을로 가서 조그마한 방을 하나 세 얻고 목수가 됩니다. 일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풍습을 배우고, 언어를 배우고, 그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순박한 생활 속에 엄청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동네 사람들과 부지런히 사귀었습니다. 마침내는 그 여인하고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듯 모든 넋을 버리고 당신을 찾아왔다,라고. 비로소 이 여인은 왕자의 엄청난 사랑을 알고, 믿고, 깨닫고 받아들여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가 되었습니다.
▣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성 다미엥이 몰로카이 섬을 지나가다가 불쌍한 문둥병자들의 무리를 봅니다. 그는 돌아와서 그 섬에 내려가 일생을 문둥병자와 함께 살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갖은 정성을 다하여 일생을 봉사하기로 한 것이니 갖은 봉사를 다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이 다미엥의 마음을 믿어주지를 않습니다. 심지어는 비판까지 합니다. 건강한 사람으로 병든 우리를, 불쌍한 우리를 돌아보는 것이 당신의 기쁨일 거라고, 취미일 거라고, 사치한 행위가 아니냐고 -- 영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봉사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 앞에 저 유명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에게도 문둥병을 주시옵소서” -- 그는 마침내 문둥병에 걸립니다. 그리고나서 저들을 돌보니 그 때에야 저들이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화폭에 그려 보겠다고 마음먹고 그 ‘아름다운 것’을 찾아나섰습니다. 여행도 다녀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믿음입니다.” 지나가는 군인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입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두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대답이 화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그런 것이 어디 없을까?’ 그런데 아무리 헤메어 다녀도 이 세 가지를 한 데 모아놓은 소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 성과도 없이, 화가는 잔뜩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문에 들어서는 그를 보고 아이들이 “아빠”하면서 달려옵니다. 그 때, 그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 여기에 믿음이 있구나!’ 또한 남편이 오랫동안 집을 비웠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정숙하고 부드러운 마음씨로 영접해줍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그는 집안에 들어설 때에 모든 생각을 다 털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참 평화를 느꼈습니다. 비로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가정을 화폭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더는 방황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습니다.
▣ 흉내라도 좋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임금님이 시골로 행차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한번 보고 싶어합니다. 지금처럼 사진도 많고, 텔레비젼도 많으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옛날에는 실제로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든 먼데서든, 모두들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가로 모여듭니다. 한편,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자리에 누워 있어 거동이 불편한지라, 이 노인은 아들에게 부탁합니다. “얘야, 나 말이다 임금님 얼굴 한번 뵈었으면 좋겠구나.” “예, 그렇게 하시지요.” 효자 아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어머니를 업고 70리길을 걸어서 임금님 행차하시는 길까지 왔습니다. 제 어머니를 아기 업듯이 단단히 받쳐 업고서, 어떻게든 어머니가 임금님 얼굴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다가 이 모자(母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멈춰라!”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된 사연이냐?” “어머니가 임금님을 뵙고 싶다 하셔서 제가 모셔왔습니다.” “참으로 효자로고.” 임금님은 그 자리에서 효자 아들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자, 이 소문이 퍼지자 다른 마을의 아주 못돼먹기로 소문난 불효자는 배가 아팠습니다. 그래서 안가겠다는 제 어머니를 강제로 업고, 임금님이 행차하실 길목에 가서 떡하니 서 있었습니다. 역시나 임금님이 이 모습을 보고 흐뭇해합니다. “이 근방에는 효자도 많구나. 기특한 일이로고. 너는 무슨 사연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왔느냐?” 불효자는 효자의 말을 그대로 흉내내어 아뢰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네사람들이 “아닙니다, 임금님. 저놈은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라고 일러바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임금님을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흉내라도 좋아. 효도를 흉내내는 것은 좋으니라.” 그리고 불효자에게도 상을 후하게 주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 흉내라도 내보세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어쩌면 그렇게도 부모님이 꼭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까?
▣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영국의 유명한 학자 사무엘 존슨(Sammuel Johnson)이 어느 여름날, 비가 막 쏟아지는데도 복잡한 장터에서 홀로 몇 시간이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면서 인사를 해도 인사도 받지 않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그냥 서서 눈물만 흘립니다. 몇 시간이 지나도 꼼짝 않고 고스란히 비를 다 맞으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지켜보던 제자들이 대체 왜 그렇게 서 있느냐고 물어보자 그제야 “사실은 50년 전, 우리 아버지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낡은 책을 사고 파는 헌 책 장사를 하셨었지, 그런데 손님들과 어느날 어떤 책을 갖다주기로 약속하셨던 모양이야.....”하며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오늘은 내 몸이 아주 좋지 않구나. 네가 나 대신 오늘 하루만 시장에 좀 나가주렴.” 아들은 발끈 화를 냅니다. “헌 책 장사 하시는 것도 창피스러운데 내가 그런 심부름을 할 것 같아요?”라며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청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할수 없구나. 힘들어도 내가 나가야지.”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장터에 나가서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리를 했던 탓인지, 그 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50년이 지난 지금, 그 아들이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부탁을 거역했던 것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야 지난날 내가 아버지께 순종하지 못한 것, 아버지를 존경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네. 그런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겠기에 내가 나를 벌주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네.” 여러분, 얼마나 더 벌을 받아야 알겠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덕을 익히지 못한 사람, 참으로 불행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 세상 어느 직장에 가서든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합니다. 순종을 못배웠으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불행합니다. 순종을 기쁨으로, 순종을 자랑으로, 순종을 자유로 경험하면서 순종할 수 있는, 그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 노예는 자유하게 됩니다
신학자 윌리암 바클리는 이 말을 옛날의 역사를 예로 들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노예제도가 있었습니다. 노예는 한번 노예로 팔리면 일생동안 노예입니다. 아무 소유권도 없습니다. 그의 재주, 그의 능력, 그가 버는 돈도 전부 주인의 것입니다. 그에 관한 한 무엇이든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생명 자체가 주인의 것입니다. 때때로 노예가 주인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충성되고 아주 진실되게 일을 하면, 주인이 그것에 감동을 해서 자기 소유에서 얼마의 돈을 줍니다. 그러면 노예는 이 돈을 신전에 갖다 맡긴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또 노예가 얼마동안 일을 잘하여 주인이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울 때에 얼마의 돈을 주면, 노예는 다시 그것을 신전에 갖다 맡기고, 또 주면 맡기고.....이렇게 하기를 반복하여 그 액수가 어느 정도로 차면 노예는 주인을 모시고 신전에 가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찾아서 자기 몸값을 치릅니다. 그 때부터 노예는 자유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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