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폐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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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골에는 방랑 이발사가 있었다. 엿장수처럼 큰 가위를 울리며 마을을 도는데, 이박자(二拍子)로 치면 엿장수요, 삼박자(三拍子)로 치면 이발사였다. 여름이 되면 이 방랑 이발사는 동구 밖 정자나무 밑에 정착을 했던 것이다나뭇가지에 끈을 걸어 거울을 매어 달아 놓았던 것이 잊혀지질 않는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이 나무 밑 이발소를 보았다. 이 나라에서는 머리 깍으러 간다는 말은 `나무 밑에 간다(온 델 드 붐)'고 하리만큼 나무 밑 이발소가 상식이 돼 있으며 수하르토 대통령 일가(一家)가 깍았다고 선전하는 그 명포 (名鋪)에 가서 이발한 적이 있다. 이발료가 50루티아-우리 돈 50원 꼴이었던 기억이 난다.인도의 나무 밑 이발소에는 이발사의 출신 계급을 명시해 놓았던 것이 인상적인데, 힌두교에 `상위(上位) 카스트 (계급)의 사람은 하위 카스트의 사람에게 살갗을 접촉시켜서는 안된다'는 엄한 계율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방랑 이발이나 노천 이발이 옥내에 정착하게 된 것은 유럽의 경우 이발소 구실보다 지역 사회의 사랑방 구실로서 십상이었기 때문이었고 터너의 기술 발달사 (技術 發達史)는 적고 있다.이같은 전통은 스위스의 이발소에 강하게 남아있다 한다. 지금도 스위스의 지방 이발소에 가면, 이발하는 손님보다 놀러 오는 손님이 더 많다 하며, 이발사는 재담이나 조크를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스위스의 전설적인 인물로 근간에 영화화까지 된 칼리는 바로 풍자와 입담으로 소문난 이발사였다. 개척시대의 미국에서도 이발소는 정보를 교환하고 물건을 거간하며 노예를 매매하는 사랑방 구실이 더 컸다.도시화와 근대화는 이 사랑방 구실을 증발시키고 머리를 깍고 수염을 깍는 본연의 이발소로 되돌아가게 해놓았는데, 근년에 또 다른 구실이 덕지덕지 가중돼 왔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바버 숍>이란 간판보다 `헤어스타일 리스트'란 간판을 내어건 가게가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 곧 남자 미용원 (男子 美容院)이란 뜻이다. 퍼머나 미안술(美顔術), 수염 손질 등 이발 요소보다 미용 요소가 주가 돼 있다. 유니섹스 미용원이라 하여 여자 미용원에 남자가 드나들기도 하고-. 거기에 안마가 가중되더니 칸막이와 샤워 시설까지 해놓고 `색(色)' 까지 도입시키기에 이르렀다. 패전 전의 사이공과 방콕의 이발소가 그러했다. 당국이 본격적으로 퇴폐 이발소를 단속하고 나섰고 또 주문 식단제 처럼 주문 이발제를 실시키로 한다는 것을 보면, 이발 외적 (理髮 外的)인 요인이 우리 이발소를 적지않이 오염 시키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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