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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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저 없는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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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1학년때 자꾸만 삐뚤어져 가는 나를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부모님은 생각 끝에 고향을 떠나 부천으로 이사를 하셨다. 처음엔 나도 찬성했지만, 막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니 힘이 들었다. 새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잘 지내고 싶어도 좀처럼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나는 점점 내성적으로 변해 말도 잘 하지 않았고, 학교에 가는 것조차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엄마는 도시락 가방에 수저를 넣지 않으셨다. 처음엔 함께 도시락을 먹던 친구들에게 수저의 여분을 물었지만 다들 없다고 하기에 나는 그냥 밥 먹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수저 하나 제대로 챙겨 주지 않는 엄마가 미울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는 새 학기만
시작되면 한동안 도시락 가방에 수저를 넣지 않아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나는 아예 학기초엔 학교 앞 가게에서 나무젓가락을 사가지고 등교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무심함이 속상하고 섭섭했다. 그러던 중3 학기초 어느날, 그날도 아침에 나무젓가락을 사가지고 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그런데 저녁에 설거지를 하려고 빈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던 엄마가 빙긋 웃으며 내게 물으셨다. '오늘 수저를 깜빡 잊었는데, 그래 친구한테 수저 빌려서 밥 먹었니'
엄마의 물음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잔뜩 심통 맞은 얼굴로 '아니, 나무젓가락 사서 먹었어'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순간 엄마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지더니 내 손을 꼭 붙잡고 그 동안 도시락에 수저를 넣지 않은 사연을 설명하셨다. 엄마는 내가 친구들을 잘 사귀지 못해 혼자서 끙끙대는 걸 아시고, 학기초마다 내게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수저를 넣지 않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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