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의 왕궁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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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 빼놓고 없는 게 없다던, 이집트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다.2000년 전인 기원 직전, 그 곳에 있었던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왕궁 터가, 그 외항 바다 밑에서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발견돼 화제가 되고 있다.금년 5월부터 1천여 회의 잠수 작업 끝에 1천 점이 넘는 석상석주 그리고 유물을 발결하고, 그 곳이 이집트 마지막 왕조인 프톨레미왕궁터임을 확인한 것이다.4세기의 대지진으로 바다 속에 함몰된 이 궁전은, 태양신인 라아신을 모시는 신전 터와 궁전 터,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거처했을이 궁터와 궁과 직결된 외항 터로 4분되었는데, 외항 터에서는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의 하나인 [파로스의 등대]도 반파된모습으로 확인됐다고 한다.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통치자인 줄리어스 시저를 홀려 그의서자를 낳았다. 시저가 암살 당한 후, 로마의 동방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던 안토니우스도 그녀의 초대를 받고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의 포로가 되고 만다.알렉산드리아의 궁전 메인 홀에, 연회장을 꾸며 휘황찬란한 상석에 안토니우스를 앉혀 두고 금 은 보석 등으로 장식한 붉은 돛단 꽃배를 타고 궁전에 들어 메인 홀에 오른 클레오파트라였으니,현혹될 만도 하다.바로 그 대연회장도 확인되었다고 한다.그후 동방 경략으로 눈코 뜰 새 없을 대로마의 대장군이 국사를버리고 한겨울 동안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곤죽이 된다. 그리고안토니우스는 삼두 정치의 실력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본처와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재혼 남녀 쌍둥이를 낳았다.동방 각국에 흩어져 있는 로마령을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에기증하기까지 했다. 본국인 로마에서는 분노를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그 분노를 집결하여 클레오파트라를 공략했다. 쌍방 5백 척의대해전 끝에, 클레오파트라가 패전 알렉산드리아의 궁전에 돌아왔을 때는 안토니우스는 자결한 후였다.그 자결 현장도 확인되어 발굴될 것이라 한다. 그녀는 신전에가 태양신의 사자인 독사에 물려 죽기로 작심을 했다. 그 신통력있는 뱀에 물려 죽으면 불사신이 된다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다.제 스스로 팔을 독사에 물려 죽어 갔던 것이다. 그 현장도 확인될판이다.궁전 외항에 있었던 파로스의 등대는 높이 1백20m로, 밤에는 50밖까지 비치는 요새를 겸한 등대였다. 그 등대 아래 보물이 묻혀있다 하여 절반쯤 파괴된 것이 대지진으로 바다 밑에 가라앉은 것이다.이 유적을 지상에 재현시키느냐, 해저에 둔 채로 정비하여 해저관광으로 개발하느냐가 쟁점이 돼 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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