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 아래로만 흐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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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아래로 흐른다. 위로 올라오게 하려면 양수기를 이용해야 한다. 강제적 방법이 아닌순리로는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할 재간이 없다는 얘기다.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또 이와 같아서 곧잘 물흐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자식에게는 가만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가는데 부모에게는 일부러 생각해야 마음이 간다는 것이다.옛사람들이 바로 이 점 때문에 효도라는 덕목을 충성에 버금가는 것으로 가르쳐 왔던 것같다.손자가 왔다.오늘은 내가 보아 주기로 한 당번날이다. 무겁던 팔다리가 거뜬해지며 아이를안고 업고 볼을 비벼댄다.시어머님께 아이를 잠시 맡겨 놓고 사과즙을 갈아 들고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팔순 중반의 시어머님이 갑자기 커다래지며 내 얼굴을 덮는다.틀니도 빼버린 합죽한 입매가가슴을 찌른다.그래 저 어른이 과일을 못 잡수신다는 게 벌써 언제부터인가. 긁어 잡수시라고 말만 했지수저와 함께 받쳐다 드린 것도 손가락을 셀 정도이다.내 곁에 온지 반년 남짓밖에 안되는 손자, 그것도 며칠 만에 한번씩 안아보는 아이가 아닌가 내년이면 만 30년이 되는 긴 세월을 한지붕 밑에서만 살아온 끈질긴 인연의 시어머님,이렇게도 쉬운 사과즙 한번 안 갈아 드렸으니 정말 자식 망한 것이 며느리라는 말이 맞기는맞나보다.“어머님 잠깐만 더 안고 계세요” 도망치듯 빠져나와 부리나케 사과를 간다. 이것 잡수시라며 내려놓는 사과즙 그릇을 의아히 쳐다보신다. 나 먹으라느냐는 시어머님 시선을 차마마주할 수 없어 얼른 아이를 안고 비스듬히 돌아앉아 작은 입에 숟가락만 열심히 들여보내고 있다.어색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는지, 나는 모기만한 소리로 어머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생각이 모자라 즙 한번 못해 드려서…하며 어머님쪽으로 돌아앉았다.“괜찮다,늙은이가 뭐 그만큼 먹으면 잘 먹고 사는거지, 뭘 더 바라겠니”하신다.하찮은 사과즙 한 가지가 이럴진대 다른 일은 미루어 짐작이 가고도 남는일 아닌가 시부모님을 평생 모시고 사는데 대해 내게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때마다 나는아니라며 모신다기보다는 그저 한집에 살 뿐이라고 손을 내젓곤 했다. 양심의 한 조각이라도 있어서 그랬던가보다.한지붕 밑에 살아주는 것만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며느리, 세 끼 밥을 저희들과 같이 먹어주는것 만으로 고마워해야 하는 며느리, 세 끼 밥을 저희들과같이 먹게 해주는 것만으로 효자·효부가 되는 기이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아직도 우리 어머님은 증손자가 오는 날에나 사과즙을 맛보며 지내신다.물을 거꾸로 올려흐르게 할 내 양수기는 아직도 자동 가동이 안되기 때문이다./오경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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