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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숭동교회 김계원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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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군생활을 거쳐 1979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계원장로는 자신이 출석하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역시 그 교회 장로인 아들(김병덕씨)을 매주일 만난다.부자(父子) 장로로 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김장로의 부친(김길준)과 조부(김태립)도 모두 장로였기에 이 가문은 4대 장로 집안으로 신앙의 굵은 맥을 이어가고 있다.이런 유서깊은 김장로의 신앙줄기는 조부에서 시작된다.기독교영향을 많이 받았던 평안도에서 경북 풍기로 이주한 조부는 1907년에 세워진 풍기 성내교회 설립의 견인차 노릇을 하며 초대장로로 시무했고 이어 31년에 부친도 장로장립을 받음으로써 역시 부자장로로 교회봉사에 앞장 섰었다.“부친과 조부는 무엇이든 몸으로 먼저 실천하고 그것을 따라 오도록 교육하셨습니다.가족이 모이면 언제나 가정예배를 드리곤 했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틈만 나면 이웃의 징병간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대신 써주고 그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어주며 전도를 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김장로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학도병으로 뽑혀 한국을 떠나기 전날 온가족이 함께 드리던 가정예배다.언제나 성경을 돌아가며 읽었는데 모친이오늘은 성경이 펴지는대로 읽자며 손에 잡히는 대로 펴자 시편 91편이 나왔고 이 쪽성경을 해방이 되어 집에 돌아 올때까지 간직했다.국군창설멤버였던 김장로는 48년 당시 중령으로 육군포병학교장으로 있었다.군목제도가 있기 전이었던 이 때 국방부에서 육해공 3군이 교파를 초월해 예배를 드리자는데 의견이 모아졌고 예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각군에서 장로를 한명씩 세우기로 했다.부대내에서 매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김장로가 육군대표로 뽑혀 정달빈목사에게 안수를 받아 장로가 되었다.당시 나이 26세 때였다.이후 6·25를 겪고 군인으로 3년 동안 18번의 이사를 하고 무수한 생사의갈림길을 넘나들었던 힘든 군생활이었지만 김장로에게 뿌리내린 믿음은 어떠한 상황과 조건도 능히 이겨내게 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것은 그때만이 아니다.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한 그 유명한 10·26 사건의 현장에 그가 있었다.김장로는 현장의 네사람 가운데 유일하게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있다.조부와 부친,조모와 모친이 자신을 위해 늘 기도해 주었던 것을 기억할 때 그 은혜를 입고 있다고 항상 느끼고 있다.“신앙 안에서 자유함과 기쁨,안식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저의2남1녀 자녀 모두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모두 건강하며 제몫들을 하고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98년 맏아들이 장로장립을 받았을 때 이 귀한 ‘신앙의 유산’이 계속 계승되길 기도했다는 김장로는 요즘 아내(서봉선권사)와 함께 가벼운 운동과 산책 가운데 매사에 감사하는 조용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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