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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찬송가 160장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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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



  ▶로우리(R. Lowry) 목사는 미국 남북 전쟁 시 전쟁에 나가 싸우다 큰 부상을 당하자 죽은 줄 알고 시체무덤 속에 던져졌습니다. 시체 속에 던져질 때 물컹함을 느꼈는데 그 시체들 속에서 그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 질 때 그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로우리야 일어나라, 내가 사망의 무덤에서 살아났느니라.'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힘을 얻어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집에 와서 생각할 때 생각할수록 감회가 컸을 것이고 지난날 생각하면 엄청난 은혜임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를 상기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 나셨네.'

  글을 쓰고 그 글에 스스로 곡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찬송가 160장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아라비아의 속담에 '돌아오지 않는 것'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화살'인데, 이는 한번 과녁을 향해 겨누고 쏜 화살은, 곧장 날아가 목표를 명중시키기 때문이요,

  둘째는, '급하게 뱉어낸 말'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로 남아 영향을 주는 '급하게 뱉어낸 말'도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과거 생활'인데,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 속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과거 생활은 절대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며 아무리 후회를 하고 탄식을 해도 그 걸어온 발자취를 지워버릴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넷째가 바로, '황금과 같은 기회'인데, 우리가 아무리 잃어버린 기회에 대해서 슬퍼하고 애를 써 봐도 한번 가 버린 기회는 다시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고대 신화에 '기회'라는 여신(女神)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여신의 모습을 보면 아주 이상하고 무섭게 생겼습니다. 바로, 앞모습은 '더벅머리'이고, 뒷모습은 '대머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더벅머리는 쉽게 잡을 수가 있듯이, 기회가 앞에 있으면 그 기회를 잘 잡을 수 있지만 대머리는 잡을 것이 없는 것 같이, 한 번 왔던 기회가 지나가면 뒤에서 아무리 잡으려고 해도 잡을 길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또 괜한 열등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나는 하늘 나라 백성입니다.' '나는 하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둘째로, '내 나이 몇 살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나이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칠 수 없는 것, 추구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바로 알면 기회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또 과욕과 허욕에 눈멀지도 않습니다.

  셋째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 백성입니다.' '하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내 나이는 몇 살입니까? 이것은 각자 스스로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출세 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후가 더 중요합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면서도 가장 알기 힘든 것이 있다면 죽음 이후 곧 내세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어 세상을 떠나 내세로 가야하기에 정말 내세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 너머 저 내세에서 이 현세로 온 사람이 없기에 내세를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물었답니다. '죽은 후의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내일의 일도 잘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참 정직한 답변입니다.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현세의 일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 너머 저 내세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도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내세를 설명하는 답을 내 놓았습니다. 수많은 종교, 철학, 그리고 민속이 제시하는 설명들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종이가 타 없어지는 것처럼 소멸되어 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조해 왔습니다.

  둘째는, '영혼불멸설'입니다.

  대표적으로 헬라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은 그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간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이승을 떠돌며 복수를 하기 때문에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굿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여러 종교 여러 민족무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윤회설입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이 죽으면 현세의 행위에 따라 내세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이 지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때로 저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輪廻)한다고 봅니다. 불교도 인도에서 시작된 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내세는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집으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현세는 사람이 지은 집에서 사는 것 같고, 내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에 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은 집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 낡고 여기저기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저기 금도 가고 비도 새고 화재나 지진에 불타거나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현세의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완전합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내세의 삶, 저 천국의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이야기 가운데 읽은 한 토막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콜로세움 경기장에 굶주린 사자를 풀어 산사람을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로마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많은 기독교도들 틈에 끌려나왔습니다. 이제 막 사자 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옵니다. 어린 아이가 두려워 떨자 어머니가 아들의 몸을 꼭 안아주면서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얘야 눈을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올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세를 살면서도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한 번은 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만남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만남이 될 것이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고,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주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의 삶과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의 삶이 다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만남을 준비하며 살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그 만남을 준비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더라도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준비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그 만남이 조만 간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그 날이 막연하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때 도적처럼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금이 그 날을 준비할 때'라는 점입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도 준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쓴 '텍사스의 한 부자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어느 날 성직자를 집에 초대해서 잘 대접한 후 그 높은 장소에서 동쪽 문을 쫙 열면서, '저 기름펌프가 펑펑 올라오는 유전이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쪽을 여니, '소 떼가 있는 목장도 자기 것'이랍니다.

  또 이쪽저쪽 창문을 여니, '골프장, 호텔이 있습니다. 다 자기 것이라며, 부러울 것이 없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는 40년 전 맨손으로 텍사스에 와서 일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성직자가 가까이 가서 어깨를 만지며 그 부자에게 말했답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부자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대와 소망은 위에 하나님이 계신 곳이지 텍사스의 부자처럼 동쪽도 서쪽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저 위에 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았는가?'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맙소사'라는 미국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지 않고 벌거벗겨 놓으신 이유를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면 그들은 '주머니를 만들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고,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다시 '돈으로 채워 주십시오'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숨을 거두려고 하는 유명한 소매치기를 위해 복음을 제시한 뒤 그의 영혼을 위해 그의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끝내고 보니 소매치기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는데 기막히게도 그의 손은 목사님의 금시계 줄이 꽉 쥐어져 있더랍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도 없습니다. 욕망 따라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거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를 만났습니다.

  그가 킹 목사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백인들의 집이나 청소하고 저들이 어질러 놓은 길이나 청소하며 살아야 합니까?'

  이 때 킹 목사가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백인들의 길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시장에 팔려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 끌려와 지치고 병들고 허기졌습니다. 모두가 길게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허리를 고추 세우고 반듯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노예를 사러 온 한 신사가 물었습니다.

  '힘들 텐데 눕지 왜 그렇게 힘들게 앉아있는가?' 그 청년 대답이 '나는 추장의 아들이요. 추장의 아들이 어떻게 땅에 누울 수 있겠소'

  바로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천국 시민권 자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식민지 작가 '마크 트웨인'이 쓴 '왕자와 거지'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1881년 그가 46살에 쓴 소설입니다. 이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날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버킹검 궁전에서 태어났고 다른 아이는 거지 소굴에서 태어났습니다. 거지 소년은 늘 왕궁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버킹검 궁전에 살고 있는 에드워드 공자는 거지 생활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 거지가 왕궁 호위병에서 혼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왕자는 그 거지를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거지를 꾸짖은 호위병을 꾸짖으려고 문으로 나갔다가 거지로 오해를 받아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거지와 왕자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말았습니다. 거지 소굴로 들어간 왕자는 거지 취급을 받아 거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거지라고 생각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속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왕자다. 며칠 후 다시 궁중으로 돌아 갈 것이다.' 밥을 얻어먹으며 모욕을 당하여도 참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왕자다. 며칠 후 다시 궁중으로 돌아 갈 것이다.' 땅바닥에서 불편하게 자면서도 중얼거립니다. '나는 왕자다. 며칠 후 다시 궁중으로 돌아 갈 것이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왕궁으로 들어간 거지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생각합니다. '나는 거지다. 조금 있다가 왕자가 돌아오면 거지로 돌아 갈 것이다.' 최고의 호화로운 침대에서 자면서도 말합니다. '나는 거지다. 조금 있다가 왕자가 돌아오면 거지로 돌아 갈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생각합니다. '나는 거지다. 조금 있다가 왕자가 돌아오면 거지로 돌아 갈 것이다.'

  드디어 운명이 바뀌는 날이 왔습니다. 왕자는 궁으로 돌아가 신분을 밝힙니다.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지를 내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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