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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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滿月)표 고무신근대 한국 신발의 주종을 이루었던 고무신, 그 고무신에 얽힌 추억을갖고 있지 않은 한국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무신 - 하면 만월(滿月)표가연상되리만큼 가장 늦게까지 또 가장 많은 한국 사람들의 발바닥과 정들었던 만월표 고무신이다. 전주에 있던 그 만월표 메이커 경성(京城)고무가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한다. 이로써 고무신은 실생활에서 증발, 추억 속의 풍물로 위상을 바꾸고 만 셈이다.2백여 년 전에 한 미국 사람이 브라질에 갔다가 그곳의 인디오들이 고무나무 유액(乳液)에 발을 담가 발을 보호하는 것을 보고, 고무로 비신(雨靴)을 만들어 판 것이 고무신의 시발이었다. 비가 많은 일본에서 이를도입, 호모화(護謨靴)란 이름으로 일상화한 것은 1916년, 국치합방(國恥合邦)이 있은 지 6년 후 일이요 이 일제 고무 구두를 한국적 조건에 맞게끔 개랑하여 팔기 시작한 것은 1922년의 일이었다. 원래가 이동(移動) 민족인 데다가 전투적인 서양 사람들의 신발은 땅에 닿는 착지 면적을 적게하고자 신발폭을 좁고, 잘 달리게 하고자 신발굽이 높으며 장애물과 추위로부터 보호하고자 발등과 발목을 덮어 씌우는 쪽으로 발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원래가 정착(定着)민족인 데다가 평화적인 한국 사람의 신발은발을 편안하게 하고자 신발폭을 넓히고 굽을 낮추었으며 발등을 개방시키는 쪽으로 발달했던 것이다. 폭이 좁고 굽이 높으며 발등을 덮은 이 외래의 고무 구두를 한국 신발의 3대 조건에 맞게끔 한국화한 것이 고무신인것이다. 고무신이야말로 외래 문물을 도입, 슬기롭게 재창조하는 문화 수용의 이상적 표본이라 할 수 있다.나라 잃은 임금님인 순종(純宗)은 고무신을 신은 최초의 한국 사람이었다. 조선 고무신의 원조인 대륙(大陸)고무가 1922년 9월 21일자의 신문에낸 광고는 다음과 같다.`대륙고무가 고무신을 출매함에 있어 이왕(純宗)께서 이용하심에 황감함을 비롯하여 여관(女官) 각위의 애용을 수하야- ' 이 최초의 고무신 메이커는 미국 공사로 재임시 갓 쓰고 도포 차림으로 양춤을 잘추어 워싱턴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하영(李夏榮) 대신이다. 만월표 고무신 공장이 전주에 세워진 것은 그 10년 후의 일이었다.당시 고무공장 큰아기는 신여성으로 무척 선망받던 존재였다. `이른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제/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감독 앞에 해죽해죽아양이 밑천/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감독 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나.'그 무렵 유행했던 `고무공장 큰아기'라는 신민요다. 한 대학생으로 부터사랑의 배신을 당하고 자살한 고무공장 큰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소복입은 수백 명의 고무공장 큰아기들이 하얀 꽃 상여 메고 전주천 다리를지나갈 때 연도에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한 시대의 비가(悲歌)를 여운으로 끌며 고무공장이 사라져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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