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자(障碍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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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자(障碍者)에 대하여
내 모습 이대로
한 사람이 농아 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기 위해 칠판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나는 들을 수 있고 또 말할 수 있게 만드시고, 여러분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게 만드셨을까요?” “왜 유독 여러분만 그처럼 만드셨을까요?”
이 엄청난 질문은 어린아이의 가슴을 무섭게 후려쳤고 그 무서운 말을 다 쓰기도 전에 아이들의 몸은 굳어 버렸고 마음도 얼어 버렸습니다.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때 한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그녀의 입술은 파르르 떨리고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칠판으로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분필을 쥐고 또박또박 써 내려갔습니다. 그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모습 이대로 당신 보시기에 좋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좋은 모습임을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인정하시는 그때에 당신의 아버지께서는 언제까지나 당신 가운데 강하게 자리를 잡으실 것입니다.
소아마비
어느 유명한 대학의 학생들 가운데 목발을 짚고 다니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평범한 성격의 그 젊은이는 아주 쾌활하며 동시에 낙관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해 많은 상을 타기도 했고 동료 친구들로부터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불구의 몸이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소아마비 때문에!" 그는 이와 같이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어쩌면 그처럼 자신 있게 매사를 처리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말해 줄 수 있겠니?"
친구는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병이 내 마음까지 파고 든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지!"
시각장애자의 간증
학교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2학년은 시험이 끝나고 아직 남은 시험을 치기 위해 1학년들만 기숙사에 남아 있었다. 난 설교 준비하느라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데 누군가 찾아와서 1학년 중 시각장애자가 있는데 시험 대필을 좀 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다. 난 쾌히 승낙하고 다음 날 아침 그와 함께 시험장으로 갔다. 60분 시험이 꽤 빨리 지나갔다. 내 시험 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는 것이 쉬우리라 생각했는데 한 시간이 끝나고 나니 내 몸엔 온통 땀투성이였다.
두 과목 시험이 끝난 후 같이 식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 1학년 초에 갑자기 실명되었다고 한다. 실명과 함께 그의 인생은 검게 물들었다. 회복될 수 없는 눈, 장님 선언, 부모들의 가슴은 새파랗게 멍들었고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빵빵거리는 차 소리는 그에겐 맹수의 울음소리로 들려왔다. 더듬거리면서 식사를 할 때마다 죽음이란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캄캄한 현실뿐이었다. 장대비 소리가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릴 때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저자로서 역시 직장 생활 중에 갑자기 실명한 시작장애자인 안요한 목사님이 찾아오셨고 그의 어깨를 치며 예수를 소개해주셨다.
시각장애자라도 이웃을 위해 살 수 있다고 하며 목사님의 삶을 그에게 얘기해주셨다. 안 목사님과의 만남으로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 그는 묶여진 고민의 사슬을 풀어버리고 눈이 보이지 않기에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참으며 타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산다고 한다. 그의 대화 속에는 진실이 있었고 그의 얼굴과 몸속에는 겸손이 꽉 차 있었다. 그는 내가 보지 못하는 커다란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대화할 때 하늘은 너무나 푸르렀다.
어느 장애자의 아사(餓死)
공양미 3백 석에 팔려가기 전날 밤 심청이는 눈먼 심봉사 동냥 다닐 때 메고 다닐 헌 전대 구멍 난 걸 꿰매 놓고, 잠든 아버님의 얼굴을 내려 보고 복받치는 울음을 참느라 목이 멘다.
'내가 아예 없었던들 다니기에 길이 익고 얻어먹기 투가 나서 아무 염려 없으련만 6,7 년간에 출입 한번 없었으니 다리에 힘이 없어 평지낙상(平地落傷) 종종 할새 자식 없는 저 봉사 누가 일으켜줄꼬.'
하반신 마비로 휠체어에 의지하는 아버지 장애자가 그를 돌보고 거둬 먹이던 18세의 아들이 절도 혐의로 구속되자, 보름을 굶은 끝에 절명한 인륜(人倫) 사고가 영주에서 일어났다. 외아들인 홍군이 잡혀갈 때의 심정은 심청이 심봉사 놓고 떠나가던 전야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심봉사처럼 구제받지 못한다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우울한 문제들이 가로놓였기 때문인 것이다.
생이별 사실을 안 심봉사, 올려 뒹굴 내리뒹굴 마른땅에 새우 뛰듯 숯불에 자반 뒤집듯 하는데 심청이 데리러 온 뱃사공들, 이를 슬피 여겨 쌀 20 섬과 돈 1백냥을 삼백 섬 외에 따로 심봉사의 의식 밑천으로 주고 간다.
홍군 아버지의 심정도 심봉사와 똑같을 텐데 의식할 밑천은커녕 의식할 거동의 채비도 없이 잡아간 법망의 무자비와 비인도가 가슴에 아프게 와 닿는다.
심청이 떠날 즈음에 동네 처녀들 몰려와 심청이 손을 잡고 울어대자 '전일의 의(誼)를 안 잊거든 내 집에 종종 들러 불쌍한 우리 아버지 등이 가렵거든 이 잡아주고, 병들거든 약 달이기 가끔가끔 하여주면 천신이 감동하여 복을 아니 받겠느냐'하며 총총히 떠나간다.
홍군에게도 친구가 있고, 이웃이 있을 텐데 어찌 종종 들러서 우리 아버지 목마르면 물 떠드리고 배고프면 라면 끓여드리라느니, 천신이 감동하게 할 여건이 돼 있지 못했던가 말이다. 현대 사회가 인간으로부터 정을 증발시키고 이해에 오그라질 대로 오그라진 미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심청이 없어진 뒤에도 심봉사는 살림살이가 이전보다 풍족하여 동네 과부들에게 재물을 과시하며 엽색 질까지 한다. 홍군 아버지는 거둬 먹일 손발이 없어 보름 동안을 앉아서 굶다가 서서히 탈진하여 죽어갔고......
인간다움을 상실한 물질 만능의 현대, 그 현대를 사는 현대인의 미래상을 그대로 구현한 죽음만 같다. 심청이 시대에 비해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교통이 발달하고 가전제품이 범람하고 의식주가 풍족하고 GNP가 상승하길 몇 백 몇 천 배인 오늘날, 현대가 심청이 시대보다 살기 안 좋다는 망상(妄想)을 고발하는 죽음이기도 하고...... 그 더욱 장애자의 주간에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육체의 가시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중에는 이 육체의 가시 때문에 평범한 인물이 비범한 인물로 된 예가 많이 있다.
미국의 루우즈벨트 대통령은 그의 소아마비가 그를 더욱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칼빈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 할 만큼 많은 병을 가졌고, 익나타우스 로욜라는 전쟁에서 다리를 다친 사람이었고, 가가와 도요히꼬는 폐결핵과 도라훔으로 고생한 사람이요 기생의 소생이었다.
샬로트 엘리오트는 평생 오빠의 집에서 누워 살았고, 다미엔은 문둥병자가 되므로 더욱 위대한 빛을 남겼다.
죤 번연은 옥중에서 천로역정을 썼고, 죤 밀톤은 소경이 되어 실락원을 썼다.
잃은 것과 가진 것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헤롤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 불구자가 됩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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