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에 대한 예화 12편
본문
선교사에 대한 예화 12편
1. 예화 - 선교사가 된 동기
한 사람이 저드슨에게 선교사가 된 동기를 물었다. “당신은 왜 선교사가 되었습니까?” “저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드슨은 이렇게 대답한 후 한참 있다가 다시 말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2. 예화 - 선교 허가권
초대 선교사 펜윅이 어느 날 조선총독부의 호출을 받고 출두하였다. 그들은 펜윅에게 “더 이상 이곳에서 선교하지 말고 본국으로 귀국하시오.”라고 하면서 “누구의 허락을 받고 한국에서 선교하느냐?”는 질문을 하였다. 이 때 펜윅은 대뜸 대답하기를 “나는 오래 전에 벌써 허가를 받았고 명령도 받아 선교하고 있는 것이오.”라고 하면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펼쳐 보였다. 조선총독부는 펜윅의 이 같은 당당한 태도에 눌려 그를 책잡지 못했다.
3. 예화 - 존 겟디의 기념비
존 겟디라는 캐나다의 한 청년이 뉴 헤브리디즈라는 섬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존 겟디는 그 섬에 도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섬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존 겟디의 열심은 그 식인종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게 되었고, 존 겟디는 그들의 언어를 연구하여 신약과 몇 편의 유명한 찬송가를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여 주었다. 점차 그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식인풍습을 버리게 되었다. 존 겟디가 죽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한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존 겟디가 1848년 이곳에 상륙하였을 때는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1972년 그가 죽을 때에는 이교도는 단 한 명도 없었다.”
- 생명의 삶
4. 예화 - 선교하며 성장하는 교회
교회성장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피터 와그너 박사의 말에 의하면, 미국 사회 속에서 5,000-10,000명 이상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살펴보고 얻은 결론은,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와 성령의 능력이 차고 넘치는 교회, 그리고 전력을 기울여 선교하는 교회들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피플스 교회 같은 경우는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치고는 건물이 너무 낡은 교회이다. 그러나 그 교회는 해외에 15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그 교회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현관 바닥 중앙에 다음과 같은 표어를 새겨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제일 먼저 세계 선교(World mission first)’라는 글귀이다. 이 교회는 세계 선교를 교회의 제일 과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5. 예화 - 선교사는 죽어서도 말한다
서울 합정동에는 한국기독교선교기념관이 있다. 이 땅을 ‘복음의 땅 끝’으로 알고 찾아왔다가 숨진 10개국 395명의 선교사들이 묻힌 곳이다. 양화진에 자리한 기념관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은혜 보답의 차원에서 이곳에 외국인교회를 설립했다. 선교사들의 묘비는 생명력 넘치는 메시지가 되어 방문객들의 영혼을 두드린다. 풍상에 씻겨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빛 바랜 묘비들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들이 적혀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A. K. 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을 위해 바치리라”(R. 캔드릭).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A. R. 아펜젤러).
6. 예화 - 선교사의 자격
리빙스턴 박사는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있을 때 몇몇 친구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우리는 자네에게 사람을 몇 명 더 보내고 싶네. 자네가 있는 지역으로 가는 좋은 길을 알아봐 주길 바라네.” 이에 리빙스턴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이 곳까지 오는 데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을 원하네.”
7. 예화 - 선교사로서의 마음가짐
어떤 교회 장로님의 딸이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를 해서 믿지 않는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남편 집안의 우상숭배와 시어머니의 핍박에 견딜 수가 없어 목사님께 상담하기를 이제는 이혼을 하고 예수님만 열심히 믿고 살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이 분에게 말했다. “이혼하는 것은 자유지만 한 달만 더 참고 살아보십시오.” “한 달쯤이야 더 살아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 한 달 동안은 부인께서 그 집에 보내진 선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보십시오. 밉든 곱든, 좋건 나쁘건 그래도 십 년 세월 동안이나 봉사하던 가정인데, 그 사람들이 다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목사님은 그 가정에 선교사를 파송한 셈이 된 것이다. 부인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돌아갔다. 부인은 그 한 달 동안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있어도, ‘나는 며느리가 아니다. 선교사다. 저 할머니도 구원해야 한다.’하고 생각했으며, 남편이 못마땅해도 선교사의 마음으로 인내했다. ‘저 남자도 내가 구원해야 될 사람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내에게 남편이 사람이 달라졌다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부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는 당신의 아내가 아니라 선교사입니다.”
이 작전(?)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그 분의 시어머니와 남편은 마침내 신자가 되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선교의 대상이다. 내가 속해 있는 가정도, 직장도 선교의 장소인 것이다.
8. 예화 - 저드슨과 선교
버어마에서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선교하고 투옥되면서 보냈던 아도니램 저드슨이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일만여 명의 군중들이 저드슨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왔다. 그는 엄청난 고난으로 말미암아 허약해져서 혼자 힘으로 연단에 오를 수도 없었고, 서 있을 기력이 없어 의자에 앉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은 볼 수 있었어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 중 청중들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고, 그 날 21명의 청년들이 앞으로 나와, “버어마로 가겠다. 저드슨을 대신하여 우리가 전도하자!”라고 외치며 선교에 헌신했다.
9. 예화 - 코 없는 선교사
한 정글 지역에 있는 기독교 학교에 아주 보기 흉한 소녀가 찾아왔다. 흉한 몰골의 그 소녀는 코가 없는 기형아였으며 저능아였다. 하지만 그 학교의 교감은 그를 환대하고 학교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학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노래 몇 마디를 배우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것이 코 없는 소녀가 가진 유일한 소질이었다. 몇 달이 되지 않아 아이들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로 더 이상 소녀를 가르칠 수 없었고 교감은 그 소녀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슬퍼하며 다시 정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소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졌다.
2년 후, 한 선교회에 정글 지방의, 마을로부터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호소의 편지가 왔다. 선교회는 그 마을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를 파송했다. 선교사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언덕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오자 몇몇 사람들이 그를 맞이하여 주민 가운데로 인도했다. 선교사는 먼저 찬양을 하나 가르치기로 하고 간단한 합창을 하나 소개했다. 그러자 300여명의 원주민들은 “우리도 아는데요.”라고 말하며 찬양을 함께 불렀다. 선교사는 너무나 놀라 다른 찬양을 불렀는데 역시 그 찬양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디서 배우셨나요? 내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말이예요.” 선교사는 놀란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고, 그들은 한 사람을 손으로 가리켰다. 바로 학교에서 쫓겨난 후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진 그 소녀였다. 그녀는 저능아였지만 온 마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들에게 찬양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비록 특출한 재능은 없었으나 온 마을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주 미약한 자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10. 예화 - 영국의 캐리
영국의 캐리라고 하는 큰 부호가 있었다. 그에게는 죠지라고 하는 아들과 윌리엄이라고 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하여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기대가 컸다. 이 두 아들이 캐리 가문에 크게 명예를 높여주는 훌륭한 두 기둥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나 다를까, 큰아들 죠지는 국회의원이 되고, 사업 수완도 있어서 돈을 많이 벌어들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아버지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윌리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선교사가 되어 인도로 떠났다. 가족들을 비롯하여 모두가 그를 강력하게 만류했지만 아무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서 두 사람이 모두 죽고 「대영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에 이름이 모두 올라갔다. 윌리엄 캐리에 대해서는 무려 한 페이지 반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형의 죠지에 대해서는 ‘윌리엄 캐리의 형’이라고 하는 말밖에 없다. 이들 중에 누가 더 자랑스러운가?
11. 예화 - 리빙스톤의 소명
어느 날 영국의 한 시골에서 아프리카인을 위한 선교와 의료사업을 위해 헌금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헌금 그릇에 헌금을 하는데, 헌금 그릇이 한 소년 앞에 이르자 이 소년이 대뜸 그 그릇 위에 올라앉는 것이다. 헌금을 집행하던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냐며 놀라서 묻자 그 소년은 말했다. “저는 돈이 없으니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 그가 바로 최초의 아프리카 선교사가 된 리빙스톤이다.
12. 예화 - 선교사 다섯 명의 순교
미국의 명문대학을 졸업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다.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아내들을 후방에 남겨둔 채 경비행기를 타고 단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는 에콰도르의 아우카 인디언 마을로 떠났다. 1956년 1월 2일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피트 선교사는 아내에게 긴급무선을 쳤다.
그가 “흥분한 인디언들이 몰려오고 있다. 기도해 달라.”라고 말한 뒤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이튿날 구조대원과 가족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복음을 거부한 인디언들에게 순교를 당한 것이다. 20대의 선교사 부인들은 울부짖으며 다같이 다짐을 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을 우리가 완수하자!” 그리고 그녀들은 아우카 마을로 이사해 복음을 전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해있다. 선교사를 살해한 다섯 명의 인디언들 중 네 명이 목사가 됐고 일천 명의 주민들은 모두 신자가 되었다. 피트 선교사 부인 라이펠트 여사는 선교사들의 용기 있는 활동을 담은 「아우카 선교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에는 50여 년 전 뿌려진 순교의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소중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