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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예화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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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예화 모음


 


 


교회의 실직자 신앙인 돕기 10계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행 2 : 44-45)



교회는 실직 신앙인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 영적 관리, 경제적 지원, 일자리 마련 등 10가지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1. 실직자 영적 관리에 나서라.

2. 실직자만의 소그룹을 만들라.

3. 실직자를 위해 기도하라.

4. 실직자를 위한 취업정보센타를 마련하라.

5. 실직자를 위한 헌금을 실시하라.

6. 실직자를 위해 쉼터를 마련하라.

7. 회개운동을 전개하라.

8. 영적 설교를 강화하라.

9 검소와 절제운동에 앞장서라.

10. 삶을 바꾸는 제자 훈련을 실시하라.




다니엘 웹스터의 신앙

위싱턴에 미국의 유명한 정치인이요, 학자요, 언론인이었던 다니엘 윕스터라는 사람이 살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같은시에 있는 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제나시골의 작은 교회만 찾아 다녔다고 합니다. 어떤사람이 물었습니다.

"웹스터씨, 왜 그렇게 하십니까?" 웹스터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가 시내의 내 얼굴을 아는 교회에 나가면 목사들이 정치인 웹스터한테 설교를 한단말입니다. 그런데 나를 모르는 곳에 가면 내게 필요한 소리 '죄인 웹스터가 어떻게 변화 되어야 하는 가를 들려줍니다. 이것이 제가 듣고 싶은 설교입니다."




교만한 신앙생활 일깨운 큰 사랑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내가 죄인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다 . 주일만 되면 교회에 열심히 나갔고 교회봉사도 열심히 했다. 주일학 교 교사로, 성가대 총무로, 중창단원으로, 집사로 교회 모임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벽기도 철야기도도 열심히 했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 해 자선음악회도 열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렇게 반복되는 습관적이고 위선적인 신앙 생활은 내게 기쁨을주지 못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으로 남보다 먼 저 인정받기를 원했고 남을 판단하는일에 앞장섰으며 분노 실망으로 억울해 했다. 나의 열심이 오히려 짐이 되어 버렸다.그러나 오래 참으심으로 기다리시는 주님의 신실하신 그 사랑이 잠 자고 있던 내영혼을깨우셨다.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내게 들어오셨다. 

나의 행함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그의로우심을 내가 믿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심을 깨닫게 해주셨다.그래서 나는 믿는다. 이제는 더이상 내가 어둠의 자식이 아니고 빛 의 자녀가 되었음을. 이제 나는 내안에 계신 성령께 순종하며 겸손하게 살아갈 것이다. 부족한 나의 것으로드리지 아니하고 온전하신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가능성을 믿는 신앙

어느 날 나는 오렌지 숲 근처에 차를 세우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나뭇가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그 쪽을 쳐다보니 어떤 사람이 총을 든 채 나에게로 다가오며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겁에 질린 나를 안심시키면서 다음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유럽에 이민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토끼를 잡아 식사 대신 영양보충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오늘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어요."

나는 그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저쪽을 보세요. 토끼가 몇 마리 놀고 있는 것이 보여요.'

그는 가망이 없다는 듯이

"오! 너무 멀리 있어서 잡지 못하겠어요."

그의 비관적인 말에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살금살금 가서 잡으시지 그래요?"

나의 이 말에 토끼는 발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잡을 수 없다고 설명하면서도 그는 그의 가족들의 굶주리는 생각 때문에 '한번 해보죠' 하는 자신 없는 한마디를 하면서 할 수 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토끼가 있는 곳에 가까이 접근하여 총을 쏘아 토끼 한 마리를 잡아서 오렌지 숲으로 나타났다. 그는 가족들을 위한 양식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이러한 많은 어려운 일들이 나타날지라도 가능성을 믿고 지체 없이 시작할 때 우리의 모든 삶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을 때마다 대로를 넓게 열어주신다.



 



자녀신앙 교육의 중요성

1. 먼저 부모들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2.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 한다

3. 부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그들의 자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 우리의 모든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가고 있음이 자녀에게 증거되야 한다.

* 신앙을 가진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즉 이 세상으 세력이 교회와 가정 속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늘 최전선에 있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의 가정에 들어와서 우리의 생활을 제멋대로 주장하게 되면 분명히 우리의 교회에도 세상이 침입하게 될 것이다. (33)

* 오늘날 각 가정은 교회를 건축할 벽돌들이다. 이 신자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가 세상에서 살기 위해 나가며, 또한 세상에 복음을 들고 나간다. 신자으 가정은 교회에서 선교의 최전선에 해당한다. 이러한 성도의 가정이 없으면 교회는 그 선교 사역에 실패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리스도를 위해 선교 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하나님늬 말씀에 선 가정과 그 가정의 교육이 최우선 순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하다. 기독교(성경적인) 교육은 세상 속에서 보다 신실한 선교 사역을 수행케 하는 방편이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지름길이란 없다. !(35)



 



자녀교육신앙

신앙인이었던 전 유엔사무총장[대그 함마슐드]는 1961년 9월 17일 아프리카 정글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일기는 이런 기도문이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사랑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나를 위하여 몸을 바치신 주님, 저도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하나이다]

이런 훌륭한 신앙은 함마슐드 자신의 꾸준한 신앙 생활의 연마에서도 기인되었으나 그의 일기집인 Markings에 의하면 부모님의 영향도 컸다.

그는 이런 말을 일기에 쓴 일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여러번 나에게 가장 만족한 인생은 조국과 인류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생애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인간을 섬기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부모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대답하라는 교훈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던 것이다.




신앙의 출발지이면서 완성

에디 쉬이퍼는 가정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첫째, 가정은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는 곳이다.

둘째, 가정은 가족들의 피난처요 보금자리다.

세째, 가정은 사람에게 필요한 돈을 벌고 쓰는 곳이다.

네째, 가정은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지다.

다섯째, 가정은 인간생활에 가장 귀중한 것들을 많이 기억하게 하는 기억의 박물관이다.

여섯째, 가정은 영원한 인간관계가 형성되고 출발하는 곳이다.

일곱째, 가정은 신앙의 출발지이면서 완성지다



 



신앙가정 앙케이트(차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김태환>

오래전에 미국 방송국에서 이런 통계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국 뉴욕 근처에 맥스척스라는 사람과 죠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척스라는 사람은 신앙과 무관한 자요, 신앙을 등한히 하는 편이었고, 결혼한 부인도 같은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얼마후 그의 자손이 1026명이나 되었습니다. 1026명을 조사해보니 무서운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자가 300병이 나왔고, 창기가 된 사람이 160명이었으며, 알콜중독자가 100명이 되었고, 가족 중 가난한자들 때문에 정부가 600만불의 국고가 손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죠나단 에드워드는 믿음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믿는 사람으로 그 부인도 신앙에 돌실한 자였습니다. 그 자손은 729명이었는데 그중에 목사가 300명, 대학교수가 65명, 대학총장이 13명, 저술가가 60명, 국회의원이 3명 그리고 부통령이 1명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과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볼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유치원에서 교육을 받으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인생이 사는 것은 비슷합니다. 같은 환경, 같은 조건에서 다같이 살지만 생기 있고 긍정적이고 자신 있게 사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폐쇄적이고 방탕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있는데 그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앙을 가진 자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자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삶을 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만 합니다.




얼굴에 나타난 신앙

예수 믿는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생겨야할까? 만약 시험관으 로 우리를 면접하신다면 합격할수 있는 얼굴을 가져야하는데 어떤 얼굴이어야 하나? 불만과 불평,찌그러진 얼굴이나 교만 과 독선,절망과 낙심,위선과 거짓의 얼굴은 좋아하실리없다. 들한 얼굴이나 절망과 낙심으로 힘이 없는 얼굴이나 위선과 조그마한 유혹을 당해도 그곳으로 치우치고,조그마한 고통을 당해도 예수님을 멀리하고,낙심과 원망이 서려있는 얼굴을 좋아하실리 없다. 신앙으로 무장한 유연하고 꿋꿋한 기상이 풍기는 얼굴을 아 름다운 얼굴이라고 합격시켜 주시지않을까? 사람의 얼굴은 묘한데가 있다.거의 눈,코,귀가 같은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 은 모양이다. 어딘가 조금씩은 다른 모양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그러기에 얼굴이 그 사람을 대표한다. 예수 믿는 사람 도 믿지않는 사람이 알아볼수있는 그런 얼굴을 간직해야한다.



 



신앙을 이기지 못하는

감리교피의 창시자인 영국의 웨슬리목사는 박사는 신앙을 멸시할 수는 있어도 이기지 못한다고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에 기록한바 있다. `1768년 1월 11일 (월요일)-이번 주간은 여가를 이용하여, 우드로우씨의 [스코틀런드 교회 수난사]를 읽었다. 박해는 신앙을 능욕하는 일이 있으나, 사실은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는 일 없이, 신앙의 승리는 명백하고, 부동의 것이다`가 그것이다.

실로 로마의 박해도, 스코틀랜드나 홀런드 및 프랑스의 박해도, 그리고 일본의 박해도, 기독교 신앙에 이기지는 못했다.



 



환경을 탓하지 않는 신앙

유명한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가 파가니니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했던 연주은 단 한 줄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일이다.그는 초라하게 연단에 나왔다. 기다리던 청중이 미소를 보냈다.

서먹서먹하며 활을 당기니 현 하나가 탁 끊어졌다. 청중은 속으로 웃었다. 또 한번 활을 그으니 또 한줄 의 현이 끊어져 나갔다. 연주장은 온통 왁 하는 웃음으로 덮였다. 한번 더 활을 갖다 대었다. 한줄 밖에 안남았는데 단한 줄의 현과 파가니니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정중히 활을 들어 한 줄을 올렸다 굵고 깊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폭풍을 뚫고 올라가 창공을  보듯 소리는 아름다왔다.

청중은 침묵 속에 귀를 기울였다. 기쁨보다 두려움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고개가 하나하나 수그러졌다. 불만을 토하던 사람들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쓸모 없는 것이라도 누구 손에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진다.




우리의 신앙고백

너는 나를 선생이라 부른다. - 그러나 너는 나에게 묻지 않는다.

너는 나를 빛이라 부른다. - 그런데 너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너는 나를 길이라 부른다. - 그런데 너는 나를 따르지 않는다.

너는 나를 진리라 부른다. - 그런데 너는 나를 믿지 않는다.

너는 나를 생명이라 부른다. - 그런데 너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현인이라 부른다. - 그런데 너는 나에게 주의를 기우리지 않는다.

너는 나를 사랑스럽게 부른다.- 그런데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자비롭다 말한다. - 그런데 너는 나를 신회하지 않는다.

너는 나를 의롭다고 한다. - 그런데 너는 나를 두려워 않는다.

너는 나를 전능하다고 한다. - 그런데 너는 나를 영예롭게 하지 않는다.



 



신앙자세

아프리카에서 한때는 많은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을 비밀로 해야

되었다. 그 당시 아프리카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던 암호인사가 있었는데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숲속에 들어가 모임을 가졌다. 그러므로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암호인사는 `당신은 박해속에서도 여전히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숲속 교회당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하는 말을 대신한 것이다. 이 암호인사에서 우리는 귀중한 신앙생활의 비결을 배운다.

우리들도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하는 질문을 언제나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야겠다.




신앙으로 시험 감당

부산에 어떤 장로님의 간증이다.

1.4후퇴 때 피난길에 부인과 같이 임진강을 건너야 하는데 부인의 임박한 해산으로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데 밤12시쯤 됐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을 열라고 해서 열었더니 `손들엇!`하는데 인민군 하나가 총을 들고 나타났다. `동무!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구! 동무는 인민공화국이 좋은가? 대한민국이 좋은가?`질문을 하였다. 그 장로님은 많이 배워 똑똑한 분인데 하는 체하지 아니하고 `저이 뭐 압니까? 호박같은 세상에 둥글둥글 살아갑니다. `대답했더니 `동무 희미한 동포야! 하더니 총살 집행이야 하면서 나가자고 할 때 부인이 일어나서 벽에 걸린 윗저고리를 입고 가시라고 잡아체는데 주머니에서 포켓 성경책이 떨어졌다. `동무 예수 믿소? `이왕 죽게 되었으니`나 교회 장로요`라고 대답했다. 이때! 그는 우리는 인민군이 아니오 수색대원이요`하면서 안에 입은 국군 복을 보여주면서 쌀밥 약 구호품을 갖다 주더라는 것이다.




신앙열심

여름철에는 누구나 물을 마실때 차가운 냉수를 마시기를 원합니다.

겨울에는 따스한 숭늉이나 보리차를 마시기를 원합니다. 미지근 한 물은 전혀 인가가 없습니다.

사람의 영혼의 상태에 대한 온도 지수에서 예수님은 미지근한 상태가 있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뜨거웁든지, 아니면 차가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뜨거운 경우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열심으로 응답하는 것이고 차거운 경우는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지근함은 전혀 무관심, 혹은 만성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 중에서도 냉정하게 거절하는 사람보다 `아 교회 나가는 것 좋지요--`는 식으로 나오는 사람이 훨씬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뜨거운자에게 보상하시며, 차거운 자에게 손을 뻗치시지만, 미지근한 자는 거절하십니다.

당신의 영적 온도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읍니까 ?당신은 찬양으로 마음이 열리고, 말씀을 들을때 감동을 받습니까 ?당신은 기도할 마음이 있고, 전도할 마음이 있읍니까 ?만일 당신이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책망을 찾아 읽는다면 새로운 각성의 기회가 될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신앙 열심의 무게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찬송가 작가인 보너(Bonar Horotius 1808-1889)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보너의 신앙 열심을 저울질 한 후 100근 이 된다고 하면서 그 열심을 분석해 주었다.

*이기심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14근

*파당적인 열심 15근

*명예 때문에 나타내는 열심 22근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나타내는 열심 23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은 26근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보너는 자신의 열심이 얼마나 인간적인 발상에서 우러난 것이었는가를 깊이 회개한 후 비로서 변화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롬10:2)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부활 사실과 부활 신앙

기독교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의 두기둥 위에 세워진 종교다. 그래서 사도행 전의 크리스챤들을 부활의 도 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행 4:2)

부활신앙을 예수의 부활 사실 밖에서 기원을 찾으려는 잡설들이 처음부터 있었다.

예수가 기절했다 살아났다느니,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사기극을 꾸몄다느니, 환상을 보았다느니, 여자들이 다른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을 것이라는 등등의 얘기 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사도행전의 부활신앙과 생명종교를 만들어 내기란 동에서 서만큼 멀고 예수가 부활한 사실보다 더 힘든 기적이다.



 



신앙과 윤리적 인격 변화

어느 소박한 불신자가 진지하게 내게 자기 소감을 말하면서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교회의 종들이 새벽마다 세상을 향해 울리고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고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짓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데 비해서 남을 도와주고 양심적으로 살아서 불신자를 인격적으로 감화 감동시키는 일이 적은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변명하기를 교회는 병원같아서 죄인들이 변화되어 가는 곳이며, 성자들도 많은데 부정적인 것이 더 과장 표출되어 있다 했더니, 자기가 아는 오륙명의 모모인사를 예를 들면서 분노해 했다.

한국 교회는 신앙은 좋은데, 윤리성이 약하다는 평이 있다

인간적으로 저질이지만 헌금 많이 내고 새벽기도하며, 교회사업 열심히 하면 고급 신자로 행세한다.

세상에서 도덕의 쌍놈이 교회의 영적 양반일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세상사람보다 촉감이 진실하고 자비와 양선과 온 유와 겸손해야 한다.



 



신앙의 산울림

미국에서 백만장자가 된 강철왕 카네기의 성공담은 유명합니다. 국민 학교도 제대로 못나오고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그는 고아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강철 회사를 설립하기까지 먼저 남을 위해 베풀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에게 직업을 주고 사원들마다 예금통장을 갖게 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는 부(부)의 목적을 [주는데] 두었는데 이것이 산울림이 되어 결과적으로 그를 세기의 재벌 [강철왕 카네기]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도 그의 사업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를 생산하여 모든 사람에게 편의를 제공해 줄까]하는 데 있었습니다. 모든 미국 시민의 발에 값싼 바퀴를 달아주려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것이 산울림을 가져와 그로 하여금 백만장자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내 중심의 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 물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면, 그 복이 30배, 60배, 1 백배의 산울림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의 것은 하 나도 없으되 내게 있는 것으로 남을 이롭게 하면 그것이 되돌아와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산울림의 법칙]입니 다.



 



위대한 신앙

1808년 유명한 작곡가 하이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연주되었습니다.

그 연주회장에는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연주가 모두 끝난 후, 사회자는 이 곡을 작곡한 하이든 선생이 이 K자리에 참석하였다고 소개하였습니다. 모든 청중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이든에게 우뢰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에 하이든은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작품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깊은 신앙이 그로 하여금 대작을 작곡하게 한 영감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

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에는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

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신앙은 겸허한 신앙입니다.




 

구약신앙 부흥의 9 특징

Walter C. Kaiser, 신앙부흥의 영적원리들, PP. 22-25. 에서

윌버 스미스의 구약에 나타난 위대한 신앙부흥의 아홉가지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앙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언제난 심각한 영적 쇠퇴와 절망상태가 있었다.

2. 신앙부흥는 하나님의 종들 중 한 사람의 마움에서 시작되었는데 그한 사람이 하나님이 손에잡혀 그분의 백성의 무감각한 양심을 일깨우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3. 신앙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고도 강력하게 선포함에 확고히근거하였다.(대하17:9/ 느8장)

4. 신앙부흥은 야훼에 대한 참된 예배의 회복으로 특징지워졌다.

5. 신앙부흥에 대한 집념이 있었다.-모든 우상들을 과감하게 파괴6. 깊은 죄의식과 자신들을 죄와 죄

를 유발하는 모든 원인으로 부터분리시키려는 강한 욕망이 있었다.

7. 피흘림의 제사가 재개되었다.(대하29:21-25)

8. 무한한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을 새롭게 경험하였다.(느8:9-10)9. 풍요로움과 번영의 시대가 뒤따랐다.(욜2:19-27)



 



 



신앙과 가정

미국의 초기 청교도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 중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에드워드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앙적인 여인과 결혼해서 신혼 초기부터 철저하게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형성해 갔습니다. 같은 때에 뉴잉글랜드에서 그와 같이 자란 동네 친구였던 맥스 쥬크는 신앙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방탕했던 여인과 결합하여 나중에 자신도 신앙을 저버려 그의 사람됨이

점차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두 사람의 가계를 추적했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드워드는 오늘날까지 617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 12명, 교수가 75명, 의사가 60명, 성직자가 100명, 군대 장교가75명, 저술가가 80명, 변호사가 100명, 판사가 30명,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의원이 1명, 미국 부통령을 1명 배출했습니다. 맥스 쥬크는 1,292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유아로 사망한 사람이 309명, 직업적인 거지가 310명, 불구자가 440명, 매춘부가 50명, 도둑이 60명, 살인자가 70명,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53명이었습니다. 이것은 극단적인 예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성이 풍부한 가정과 그리스도가 떠나버린 가정과의 차이를 여실히 볼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당신의 가정에도 영성을 회복하십시오. 신앙적인 원리가 당신의 가정에서부터 실천되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가정은 깨끗합니까? 그리고 가족 모두가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하십니까? 또한 늘 영성이 넘쳐 찬양과 기도가 끊이지 않습니까?




신앙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스위스의 라브리에서 세계의 지성들이 모인 가운데 이 시대의 방향과 믿음의 갈길을 제시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났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절대 가치를 버린 것이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의 표현을 빌리면.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의 선밑으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가치, 절대 표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있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 아래서 옳다. 그르다 하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사람들은 절대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는 반드시 한여인과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19세기 전까지는 누구나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사람들조차도 일단은 받아들이고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혼이 왜 죄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만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냐고 따지고 들게 되면서 절대 표준과 절대 가치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의 도덕적인 혼란과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썩 내키지 않아도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싫은데”라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절대 가치에 대해 현대인들은 “그것이 왜 우상이냐?”고 따지며 절대 가치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옛날 히브리의 세 청년은 우상숭배 문제에 대해서는 토의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러한 타협하지 않는 절대적 신앙이 필요  합니다.



 



성숙한 신앙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 상의 꽃다운 피흘림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의의 피를 흘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성숙된 기독교의 표현이다. 성숙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죽음을 넘어선 존재이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과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요, 진리를 깨닫는 것은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다. 나와 하나님은 하나요 성령과 나는 하나이다. 내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이듯 나와 하나님은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박 영호,[씨알-유영모의 생애와 사상])



 



신앙생활은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본문: 마가복음 1장 9-11절



세례 요한은 자기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주님 앞에서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확고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면 전혀 다른 장면이 연출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메시야를 예비하는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죄인처럼 되어 요단강으로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십니까? 이 예수님의 세례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 예수님이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신앙생활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교훈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처럼 내려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고,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을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높아집니다. 그리고 죽어야만 부활이 있고, 죽어야만 한 알의 밀이 백 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들의 세상살이에서도 고민과 갈등과 다툼 그리고 자존심의 깊은 상처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고 화를 내는 것도 모두 이 내려가는 생활이 서툴러서 그런 것입니다.

내려가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생활입니다.

보세요! 우리의 신앙의 뜻은 날마다 저 놓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지만 신앙의 생활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내려가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신앙이 주는 신비스러운 힘과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2. 둘째,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셨다>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누가 받는 것입니까? 죄인이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으로 친히 내려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의 모습이 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줍니까? 주님께서도 스스로를 죄인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것은 큰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제일 옳게 산다고 제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그런 냄새를 풍기면 주님의 삶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는 그런 냄새는 절대 풍기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3. 셋째, 죽음의 자리로 <내려가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원래 온몸을 강물에 침수시키는 예식입니다. 내 전신이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은 이제 나는 완전히 죽었다는 의미이며 내가 다시 물 속에서 나오게 되면 이제 나는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았다는 의미로서 즉 영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분당 정자동 126-1번지에 존재하고 있지만 그런 주소와 달리 우리의 영적 주소는 항상 요단강에 있어야 합니다. 왜 교회 건물 위에 십자가를 세웁니까? 이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요단강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이 요단강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어야 그가 곧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고, 그리고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한 사람이라야 성령강림절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단강의 역사가 없이 성령 강림의 역사가 있음을 믿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속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독교가 무속신앙을 따라가면 됩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서야 성령 충만할 수 있는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세례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어떤 성경학자는 이 구절을 보면서 두 번째 창조라는 말을 썼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처음 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땅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습니다. 바로 그 다음에 빛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임하여 요단강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그런 장면이 창조의 장면과 유사하다고 해서 두 번째 창조라는 용어를 쓴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두 번째 창조 세계의 질서 안에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는냐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하늘이 갈라졌다는 말은 하늘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닫혔던 하늘이 주님의 순종으로 열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어떻게 임하고 성령을 어떻게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받으려고 하늘까지 올라가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 받으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허하고 빈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성령이 어떻게 임했습니까? 10절을 보니까 비둘기 같이 임했습니다. 성령님은 독수리같이 임하지도 않았고 참새같이 임하지도 않았습니다. 독수리는 힘, 강요, 강탈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독수리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적극적이라고 하지만 그 자기 중심적인 적극적인 신앙 때문에 상처받는 주변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참새는 수다, 불안, 가벼움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참새같이 임한 성령을 받은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하면서 열심히 파닥거리지만 집에 와서는 또 불안과 염려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입만 살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독수리나 참새같이 임하는 성령이 아니라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자에게는 위로, 평화, 부드러움, 온유함이 꼭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비둘기같이 임하는 성령님에 대한 묘사는 성령님이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평화를 주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위에 임하실 때 비둘기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완벽한 평화의 사자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평화를 주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평화가 전달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비둘기같이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여 상처와 아픔이 없는 건강한 믿음 공동체의 초석이 다 되길 바랍니다.



 



무엇을 위한 신앙인가?

성경: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었음이니라 (출 22:21)

지난해 5월 31일 조선족 서문봉 씨(45)는 한국인의 몽둥이에 맞아 아산재단 강릉병원에 실려갔으나 치료 도중 뇌사상태에 빠졌다. 한국인 가해자는 "몸으로 때우겠다."며 교도소행을 선택했다. 병원측은 치료비를 받는 대신 장기기증을 주선하려 했지만 책임질 가족이 없어 불발. 6월 10일 마침내 사망했다. 중국에서 입국한 그의 부인은 남편의 시체를 찾아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치료비 1천 3백만 원을 지불해야 시체를 찾아갈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의 부인은 남편 사망 후 5개월이 되자 병원에 가서 "시체를 내놓아라. 아니면 내가 여기서 죽겠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병원측은 영안실의 시체 안치료 5백만 원을 더 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에게 면담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고 청와대까지 편지를 보냈다. 수일 후 그녀는 남편의 유해를 받았고 장례를 치렀다. 사망자는 보상금은 차치하고 임금 450만 원과 빌려준 돈 200만 원도 받지 못한 채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그의 부인은 "고국에서 맞아 죽은 것도 서러운데 보상도 못 받고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이 곳이 과연 고국인가."라면서 통곡했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고국 땅을 밟았던 그들에게 우리는 작은 마음의 여유도 베풀지 못했다. 우리는 그러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 이러한 마음은 남을 먼저 대접하고 나도 그러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이해와 용서와 사랑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 나그네와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겠다.



 



워너메이커의 신앙

미국의 워너메이커는 백화점 경영의 귀재라는 평을 받았다. 전국에 수백개의 백화점을 거느린 백화점 왕이다.

그는 어느날 백악관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은 그에게 체신부장관을 하라고 했다. 실업가로서 화려하게 성공하고 장관까지 된다는 것은 영광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제의를 받고 두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아무리 바빠도 주일은 고향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주일성수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 맡고 있는 교회학교 교사직을 고수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대통령은 그의 조건의 이유를 물었다. 워너메이커는 자신의 중심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1달러50센트짜리 성경을 월부로 사서 읽었습니다. 그때 나는 다짐했습니다. 평생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세상을 중심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람도 인정하지만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신앙의 족보

우리나라의 성(姓)씨는 약 250개,본관은 1000여개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족속의 계보를 기록한 족보를 아주 소중하게 여겨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족보에 이름이 들어있느냐,누구의 자손이냐에 따라 양반과 천민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입니다. 조성윤씨가 쓴 ‘우리는 지난 100년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의 ‘가족 가문의 사회사’를 보면 조선 중기까지 전체 인구 중 양반은 10% 정도였고 40% 이상이 노비였다고 합니다. 1801년 공노비 해방과 1894년 신분제도 철폐로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사라졌고 1896년부터 작성된 호적에 노비라는 글자가 없어지면서 여러 가지의 성씨를 갖게 되었습니다. 신분제도가 없어지자 너도 나도 양반 행세를 하며 족보 만들기 붐이 일어나 1920∼30년대 우리나라 전체 도서 발행 부수의 60%가 족보였다고 합니다.

성경에도 족보가 나옵니다. 성경에는 아담에서 노아 ,노아에서 아브라함,그리고 아브라함에서 다윗,다윗에서 예수그리스도까지의 계보가 열거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족보는 우리나라 족보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위한 확실하고도 정확한 혈통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것은 마태복음의 족보와 누가복음의 족보는 같은 내용이지만 구성은 다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까지 올라갑니다.

이유는 이렇다고 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위에서부터 밑으로 내려오심이요,누가복음은 우리의 믿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두 족보의 공통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도,우리의 믿음도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족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중심인 까닭에 예수님에 대한 족보로 기록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BC(Before Christ·예수그리스도 이전)와 AD(Anno Domini·예수그리스도 이후)로 나뉩니다. 이렇듯 역사의 한 중심에 계신 분이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인류의 중심이며 바로 성경의 족보는 인류의 중심이신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예수님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족보는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의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는 말씀 뒤에 “나 ○○○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리라”고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의 족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 위에 예수님이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바로 나의 족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마가복음 16장 15∼16절에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만민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예수님의 족보에 올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이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족보의 특성은 진행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족보도 영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끝나는 족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세대 사람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야 합니다. 가정의 가족 모두가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빛나고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의 홍보요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일상 생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를 친밀하게 느끼게 할 수도 있고 적대시할 수도 있다. 세퍼드는 " 성직을 맡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오늘날 교회의 커다란 결함이다"라고 하였다. 전쟁중에 한 농장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신앙을 다 낡아빠진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농장 주인 부부는 참다운 그리스도인들로서 그 소녀에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고, 그 소녀도 마침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소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어요.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요. 그리고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기독교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어요. 하지만 나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농장 아주머니를 따라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소녀가 하나님께와 기독교의 신앙에 이르는 길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통해서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독교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교인이 되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책임을 지워 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믿음을 위한 하나의 공개장이다.



 




워너메이커의 신앙

미국의 워너메이커는 백화점 경영의 귀재라는 평을 받았다. 전국에 수백개의 백화점을 거느린 백화점 왕이다.

그는 어느날 백악관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대통령은 그에게 체신부장관을 하라고 했다. 실업가로서 화려하게 성공하고 장관까지 된다는 것은 영광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제의를 받고 두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아무리 바빠도 주일은 고향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주일성수를 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 맡고 있는 교회학교 교사직을 고수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대통령은 그의 조건의 이유를 물었다. 워너메이커는 자신의 중심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1달러50센트짜리 성경을 월부로 사서 읽었습니다. 그때 나는 다짐했습니다. 평생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다고”세상을 중심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람도 인정하지만 하나님도 기뻐하신다.



 



아름다운 신앙유전(信仰遺傳)

목포에는 우리 한국 교회의 자랑스러운 장로님이 계시다. 홍부국 홍순기 장로님 부자다. 아버지 홍 장로님은 살아 생전에 교회에 충성되고 주의 종을 잘 세워주시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목포의 빈민가를 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눈여겨 두었다가 구제할 돈을 마련해서 꼭 목사님께 드리곤 하였다.

"목사님. 어디어디에 가니까 꼭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디다. 한 번 찾아가 도와주시지요."

그러면 목사님은 그 구제금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한다. 그는 가난한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주의 종을 세워주었다. 자선으로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영혼을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웠다. 사려 깊은 신앙 고백의 삶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장로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마음 속에 한이 되고 원이 된 것이 있었다. 평생 예수 믿으면서 선한 일을 많이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 싶은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아버지 장로님은 아들을 불러 유언을 하였다.

"아들! 나에게 소원이 있네. 평생 예수 믿으면서 성전을 지어 봉헌하고 싶었지만 너무 가난하고 여유가 없어서 하지 못하였네. 아들이 꼭 해주게!"

장로님은 대를 이어 성전 봉헌의 꿈을 꾸었다. 하나님께서 성전 봉헌의 목표를 세운 홍장로님 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홍순기 장로님 대에 물질적 축복을 내려주셨다. 아들 장로님은 목포에 땅 천 여평을 사고 40억 여원의 돈을 들여 아름다운 성전을 짓고 봉헌하였다. 봉헌 액수도 성도들의 추산이지, 장로님은 바친 액수를 알면 교만해진다면서 장부에 기장도 하지 않고 건축하였다고 한다. 지금부터 십 수년 전 일이다. 언젠가 목포를 방문하여 그 장로님 댁을 방문하였다가 더 놀랐다. 장로님이 사는 새 집 옆 같은 마당에 아버지 장로님이 사시던 옛집이 그대로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과 성경책을 그대로 두었고, 아버지가 기도하던 탁자와 방석도 그 자리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한 차례씩 아버지가 기도하던 자리에서 아들이 똑같이 기도생활을 하고 있었다. 목포에서 유수한 기업체의 사장이었으나 주일이면 교회에 일찍 나와 겸손하게 머리 숙여 성도들을 맞이하였다. 기도와 헌신의 거룩한 부전자전을 보면서 나는 감동하였다. 그런데 얼마 전 부산에 한 교회에 부흥회를 가서 보니까 홍순기 장로님의 동생도 부산에서 한 교회를 건축하여 봉헌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부자간, 형제간의 신앙유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님은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네게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왕상 8:18) 하면서 다윗을 인정하셨다. 그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의 그 마음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였다. 효자의 마음이다. 나는 홍 장로님 부자의 신앙유전을 들으면서 다윗과 솔로몬을 기억하였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목표를 세우고 대를 이어가는 믿음의 가정에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있다. 나는 나와 우리 성도들의 가계가 이 신앙유전의 이 아름다운 은혜 속에 거하기를 기도한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왕상 8:23)



 



분명한 신앙으로

우리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헤밍웨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는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동안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았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신앙으로 키우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 성가대복을 입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신앙에서 이탈했고, 급기야는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위대한 소설가로서는 세상에 남았을지 몰라도, 하늘나라의 역사에는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타락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즈음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나는 전지 약이 다 떨어지고 코드를 꽂으려 해도 꽂을 전원이 없어서 불이 들어오지 않는 라디오의 진공관처럼 외로움과 공허함 속에 살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하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 고귀한 유업을 내던졌던 에서와 같은 경솔한 자리에 들어가지 맙시다. 여러분의 신앙이 어느 상태에 있는지 스스로 확인하십시오.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없습니다. 확실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어정쩡하게 처신하다 보면 마귀의 올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신앙심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의로운 결단 속에 주님은 함께하십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앙

본문: 고후 4:16-18

인도의 어느 선교사가 주님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힌두교(Hinduism)를 믿던 소녀가 몹시 흐느껴 울더라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이 선교사는 그 하염없이 흐느끼는 소녀를 붙들고 무슨 슬픈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소녀의 대답이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토록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참지 못하게 하여 우는 것입니다." 하면서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소녀의 말을 들은 선교사는 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이러한 감격과 처음에 믿던 신앙의 열과 체험이 마비되었을까 하면서 자신의 무감각해진 신앙과 마비된 신앙의 체험을 안타까워하면서 회개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팝콘 신앙

팝콘은 인류의 조상이 맨 처음 발견한 식료품 중의 하나다.

고고학자들이 뉴멕시코 중서부에서 발견한 가장 오래 된 옥수수알은 5500년이나 된 팝콘 알이었다. 유타 주 남서부의 메마른 동굴 속에서 1000년이나 된 튀긴 옥수수알이 발견되었다.

17세기 프랑스 탐험가들은 미국 5대호 일대를 탐험하다 인디언들이 토기그릇에 뜨거운 모래를 담아 옥수수를 튀기는 것을 목격했고, 18세기 스페인의 탐험가는 파라과이에서 튀긴 팝콘이 여인들의 머리카락에 묻으면 쉽게 떨어지지 않아 그것으로 머리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보았다.

인디언들은 옥수수알 속에 갇혀 있던 조그마한 악마가 옥수수알에 열이 가해지면 퍽 소리를 내며 뛰쳐나온다고 믿었다. 사실은 악마가 아니라 옥수수알 속에 수분이 14%가 함유되어 있던 옥수수알이 섭씨 205'까지 열이 가해지면 수분이 수증기로 바뀌면서 팝콘이 되는 것이다.

이 때 눈꽃처럼 부풀어 오른 부피는 본래 부피의 35-40배나 되어 보기 좋고 먹기 좋은 팝콘이 된다.

사람도 신앙생활이든 다른 어떤 일이든 속에서 우러나오는 열심으로 그 일을 해야 모든 일에 필요한 존재가 되고 칭송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께 맡기는 신앙

디마스라는 분은 사업을 하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빚을 갚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 계속 망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업의 주인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의 계획에서부터 결재를 받는 것까지 모두 주님께 의뢰했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주님과 의논했습니다.

그리고 사업은 주님께 맡기고 그분은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미쳤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망하고 있는 사업을 돌보지 않으니 더 망할 것이라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사업성공의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운영을 주님께 맡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사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믿을 바에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믿어야 합니다(시 55:22).

묵상: 당신은 모든 일에 얼마나 주님을 믿고 맡기면서 살고 있습니까?(벧전 5:7)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사람이 순종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순종이 나오지 않습니다.사람이 법을 준수하는 것도 일종의 순종입니다.법은 비인격이기 때문에 지킨다,준수한다라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순종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사람들은 순종을 기피하는 영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불순종의 죄는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납니다.또한 자아 숭배와 자기 높이기의 유혹에 빠지면 불순종하게 됩니다.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결국 예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승리

모 회사의 젊은 생산과장 한 분을 내가 안다. 그는 근래에 와서 자기 회사 제품이 규격 미달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되고 있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도저히 그대로 묵인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사업도 신앙적으로 일치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고민하던 끝에 그가 나를 찾아 왔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규격 미달품을 완전한 물건이라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 운영자에게 그 사실을 진언하면 분명히 자기는 파면되고 말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며칠 후, 그는 용기를 내어서 회사 지배인에게 더 이상 그 상품을 제조 판매하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신앙 양심에 위배되기 때문에 시정되지 않는 한 자기는 더 이상 생산과장의 직을 계속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에서 파면될 줄 알고 며칠동안 출근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웁게도 그 상품의 생산을 중단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의 양심적인 결단력이 회사 중역들에게 인정되어 파면 대신 도리어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그의 신앙은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반드시 항상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의 결과는 반드시 신앙인에게 현실적으로 유리하게만 된다는 보증은 없다. 반드시 현실적으로 유리한 결과뿐이라면 신앙이란 필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지 못할 미래이기에 신앙인은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찬양과 기독교 신앙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확연히 다른 것은 찬양에 있다. 오늘날 현대 음악의 근원이 모두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서 출발한 것으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헨델의 할렐루야이다. 찬양과 승리적인 신앙생활과는 끊을래야끊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



(본 론)




1. 가장 어둡고 괴로울 때 찬양하라.



1) 악마가 원하는 것은 어둡고 괴로울 때 원망,탄식하는 것

2) 어둠을 이기는 힘인 찬양

(1)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실 때 찬양하심.

막14:26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가니라`

(2)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 듣더라 (행 16:25).



3) 찬미할 때

(1) 마귀권세가 무너진다. (2) 마음이 긍정적이 된다.

(3) 주께서 임재하신다:이스라엘의 찬양중에 거하시는 하나님



2. 마음의 즐거울 때

약 5:13 `너희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2) 여호와를 기뻐하라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3) 힘이 생김 (느 8:10)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3. 성령으로 충만할 때

 엡 5:18-21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결론): 기독교는 찬미와 함께 걸어왔다. 핍박 당하거나 순교할 때도 찬미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울 때도 찬미하고, 기쁘고 형통한 날에도 찬미했다. 찬양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 가아니다.



 



전심의 신앙생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 9:13)

히스시야왕은 병들어 죽게 됐을 때 평소에도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던 그는 전심으로 기도하여 15년을 더 사는 축복을 받았다.(사38) 솔로몬은 전심으로 지혜를 구했다. 성서의 간구들은 전심으로 생명을 건다. 야곱의 기도, 모세의 기도,

엘리야의 기도, 에스더의 기도, 사도행전의 인물들은 전심 전념 지성을 다했다. 눅1 8장 과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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