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속의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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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속의 예화
‘마지막’의 여운과 여유
‘마지막’이란 말은 사람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사실 신학적 종말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하나님이 매일 새롭게 제공하시는 시간들이 태초의 사건처럼 우리 삶 가운데 개입하듯, 그것은 종말을 향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이렇듯,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태초와 종말의 시간은 하나님의 사건을 매개로 서로 긴밀히 삼투하며 교접한다. 그래도 아날로그의 체계에 맞춰 구획되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 곧 12진법의 시계와 달력의 마지막 시간들은 새로운 희망의 저편을 향해 기묘한 여운과 함께 우리의 심사를 제법 웅숭깊게 만들곤 한다.
그러나 그 여운이 꼭 여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의 시간은 불안과 후회의 시간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 지난 시간, 저무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그런 아쉬움의 회한 한 조각 없이 마냥 당당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직 갈 길이 먼데, 뒤에 성급하게 두고 온 시간들이 영혼의 뒷덜미를 잡는 것이니, 그로 인해 너무 황망해하지 말 일이다. 그 결핍으로 인한 회한이 충분히 이룬 포만한 성취의 자의식보다는 더 나을 터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런 깨우침을 옥중경험을 통해 빌립보서 3장 12-16절에 잘 풀어놓았다.
뒤에 있는 것 잊어버리기
바울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겠다고 작심한 것은 과거의 교훈을 망각하겠다는 것도, 성찰의 근거를 지워버리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의 목표를 위하여 궁극 이전의 모든 가치들을 상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 궁극 이전의 모든 것들은 바울에게 충분히 성취감을 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유혹의 빌미를 떨쳐내면서 말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 3:12). 그는 이 대목에서 아마 불현듯 자신이 개척한 교회와 전도한 사람들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그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숱한 고생을 했고, 그만큼 성과도 있었다. 인간적인 마음에서 그는 그것을 자랑할 만했고, 특히 그를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향해 공치사의 분위기를 조장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어찌 보면 인정욕구의 발로란 견지에서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그런 유혹의 미끼를 덥석 물지 않았다. 그럴 경우 그런 외형적 성과주의와 업적주의의 발상이 자신의 여정을 현재에 묶어두고 거기서 자신의 성채를 지으며, 궁극적인 것을 향해 나가는 그의 발걸음을 궁극 이전의 것들 속에서 겉돌게 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는 얻어야 할 삶의 궁극이 있었고 온전히 이루어야 할 신앙의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부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향하여, 그 권능을 확신하며, 거기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신도 고난으로 부활을 미리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빌 3:10). 그것이 뒤에 있는 것을 굳이 잊어버린다고 말한 까닭이다. 또 그것이 현재의 성취에 들떠 스스로 공치사하기를 사양한 이유이다.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것은 살아생전 완성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죽기까지 감당해야 할 고난 어린 십자가의 길이다. 바울은 “죽는 것도 내게 유익이라”는 발견과 함께 이 점을 옥중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게 죽어야, 또 그 죽음이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는 수준으로 나아가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여 자신의 부활을 맛볼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빌 3:10-11).
앞에 있는 것 잡기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신의 미래 완료적 부활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리라는 소망은 막연한 기대사항이 아니었다. 앞을 향해 별 목표 없이 죽어라고 고생만 하는 것이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아닌 셈이다. 바울은 그 소망의 내용에 관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잡기 전에 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혔다. 그 붙잡힘의 자의식이 그에게는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 속에 강화되었고, 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불굴의 소명감으로 표출되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을 붙잡았고, 바울은 그로부터 받은 부르심을 쫓아 그것을 잡기 위해 달려간다는 것이다. 달려가는 것은 어슬렁거리면서 걷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목표 지점을 향해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신속하게 질주하는 동작이다.
바울에게 앞에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선교의 목표였지만, 동시에 붙잡고자 한 것은 그것의 종말론적 완성 이후 드러날 선교의 결실과 그로 인한 ‘부름의 상’이었다. 그 상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는 하늘의 상으로, 가령 이 땅의 우승자가 받는 면류관 따위와는 현격히 다르다. 그 마지막 목표지점에 도착하기까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자꾸 떠올리는 것이 외려 그 궁극을 향한 여정에 심리적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잊어버린다고 그는 말한다. 이미 지난 뒤의 것을 잊어버려야 앞에 있는 것을 잡을 수 있다. 푯대를 향하여 집중하려면 과거의 성취조차 성가신 방해가 된다는 사실의 자각은 평범하지만 현실화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사람들은 제가 머문 곳에서 이루어온 만큼 인정받기를 끈질기게 갈망하고, 그로 인한 공치사로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본받아 충분히 죽지도 않고, 부활의 영광만을 겉멋에 들떠 선취하는 일은 성급하다 못해 불경스럽다. 아니, 불온하기까지 하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영원의 팻말 위에 비끄러맨 채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을 과장하여, 하나님의 공적인 성취가 아닌 자신의 삿된 성취임을 시위하려는 불순한 동기가 그 저변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건을 중심으로 자리매김되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대에서 마지막은 늘 맨 처음으로 열려 있기에 싱그럽다. 바람은 자기의 자취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한다. 그런데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대개 바람과 같다고 한다. 가령, 공터에 보이지 않게 약동하는 생명의 신진대사에 바람은 소리 소문 없이 개입한다. 그렇게 공을 이루고 몸은 빼고, 공을 이루지만 그것에 붙들려 그 안에 거하지 않은 채 훨훨 새로운 곳으로 떠나갈 때, 그게 바로 푯대를 향한 삶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붙잡힌 바 된 영혼의 자유스런 행방이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부르심의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마지막 달, 세밑에 누구나 소란스럽기 쉽다. 황혼녘의 인생일수록 하늘의 푯대를 망각한 채 이 땅의 성취감에 들려 각종 공치사의 미끼에 들뜨는 경향이 있다. 제 생의 마지막을 멋지게 장식하려는 충동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멋진 장식의 본질이 누추함이란 걸 알아차린 영혼은 뒤에 있는 것들을 향해 하등의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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