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에 대하여
본문
선에 대하여
경이로운 물질
소금은 경이로운 물질이다.
소금은 두 가지의 유독성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생존에 있어서 필수적인 소금이 그 개별적인 구성원소로는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나트륨과 염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물도 또한 경이로운 물질이다.
물의 화학방정식은 H2 O2이다. 그것은 산소마다 2개씩의 수소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소는 가연성 물질이며 수소도 또한 쉽게 타오른다.
이러한 수소와 산소가 결합되어 물이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이 물로 불을 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신묘막측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무엇을 위해 뛰었나
옛날에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개 한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개가 특별히 자랑하는 것은, 자기가 아주 잘 달리는 선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개가 토끼 한 마리를 쫓아갔는데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대 망신이었습니다.
다른 개들이 마구 놀렸습니다.
그러자 그 개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자네들이 알아야 할 것은 그 토끼는 목숨을 위해서 뛰었고, 나는 그냥 저녁 식사거리를 위해서 뛰었다는 점일세!"
선의 짝
지구를 뒤덮는 대홍수 때, 온갖 동물들이 노아의 방주로 들어왔다. 이때 선(善)도 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노아는 선을 태워주기를 거절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암수 한 쌍이 아니면 태우지 않는다!"
그래서 선은 숲으로 돌아가 제 짝이 될 상대를 찾았다. 그리고 악(惡)을 데리고 와 배를 탔다. 그 이후로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선의지의 한계
가브리엘 마즈세르의 희곡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매혹적인 젊은 여성이 누구의 눈에도 신통치 않은 못난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모두가 자기를 멸시하는데 뭇 남자들의 우상 같은 존재인 그 여자가 자신과 결혼해 준 사실을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의식으로 인해 그 여자의 결혼의 동기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 여자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든지 꼬집어주고 싶다든지 하는 야릇하고 못된 심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아내는 그 열등의식을 고쳐주려고 했습니다.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보려는 선의를 지닌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열등감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순수한 사랑이 거부당하는 수모와 열등감과 불만을 남편에게 보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남편의 열등감을 고쳐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열등감이 있는 척하여 자신을 고치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내를 천사처럼 생각하기보다는 그 순수한 사랑을 학대하고 짓밟고 모욕했습니다. 결국 거듭되는 악순환 속에서 아내는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남자에게 도망을 가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한 편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선의지(善意志)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이기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선이란 때 묻은 의복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에는 어떠한 사람의 선도 자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선행
한 가게 주인이 스승에게 와서는. 맞은편에 큰 연쇄점이 생겨서 자기는 망하게 생겼다고 했다. 자기 가정이 100년 동안 지녀온 이 가게를 잃어버린다면 자기는 다른 기술도 없으니 파멸할 것이라고. "그 연쇄점 주인을 두려워한다면,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가 파멸의 원인이 될 걸세."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매일 아침 가게 앞에 나가서 자네 가게를 축복하고, 돌아서서 연쇄점도 축복하게."
"아니 , 경쟁자요 파괴자를 축복하라고요?"
"자네가 그에게 축복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네에게 좋게 되돌아 올 걸세. 자네가 그에게 바라는 악은 무엇이든 자네를 멸망시킬 걸세."
여섯 달 후에 그 식료품 가게 주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우려했던 대로 가게를 닫아야 했지만 지금은 그 연쇄점을 맡고 있으며 어느 때보다도 경기가 좋다고 했다.
선행 2
어느 날 왕이 어떤 사나이에게 사람을 보내어, 즉시 자기에게로 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그 사나이에게는 세 친구가 있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몹시 소중하게 여기고 있어 그 친구를 자기의 제일 다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번째 친구 역시 사랑하고는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친구는 친구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왕의 명령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악한 짓을 하여 벌을 받는 것이나 아닌가 하여 두려웠기 때문에, 혼자서 왕에게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세친구들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는 먼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친구에게 함께 가자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이유도 말하지 않고서 싫다고 거절했다.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궁궐 문까지는 함께 가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네]하고 말했다.
그러나 세 번째 친구는 의외로. [암 함께 가주지, 자네는 아무 것도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그렇게 말씀드려주지] 하고 말했다.
왜 세 친구들은 각각 그렇게 말했을까?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지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두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는 곧 친척이다. 무덤까지는 따라가 주지만 그를 거기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린다.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이다. 착한 행실은 평소에는 별로 눈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있기 마련이다.
선행 3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하면서 대 심방을 하던 어느 날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환자가 누워있는 한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대 심방이라면 장로, 권사, 집사하여 7-10명의 수행원이 함께 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미처 모르는 중에 지금 이 환자가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어느 장로님 한 분이 환자가 누워있는 아랫목에 손을 넣어 보고는 싸늘해, "아이고 연탄불이 꺼졌는가 보구면"하고서는 당장 부엌으로 나가보더니 정말 연탄불이 꺼졌다며 들어와서는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병원에 가보았느냐고 물어 봅니다.
그러나 "병원에 갈 돈이 있어야지요?" 하고 환자는 힘없이 대답을 합니다. 이 장로님은 생활이 그렇게 넉넉한 분이 아닙니다. 그저 구멍가게 같은 데서 장사를 하며 지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께서 자기 주머니에 들어있는 장사 밑천 그대로를 모두 꺼내어 가만히 이불 밑에 넣어놓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장로님 얼마나 드린 겁니까?"하고 물어 보았더니 자기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사는 무엇으로 하시렵니까?"하였더니, "아! 장사야 내일 또 벌면 되지요, 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새삼 그 장로님이 참 귀한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첫 동기, 첫 마음, 처음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맨 처음에 생각되어진 그 직감적인 긍휼에서 선행이 이루어지게 할 것이란 말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두 번 세 번 생각하다보면 그러는 동안 벌써 그 선행은 행하지 못할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다음 일은 생각할 것 없이 처음에 가지는 그 뜨거운 사랑과 그 긍휼 그대로를 가지고 행할 때 그것이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선행에 낙심치 말라
미국 <뉴저지주> 서멀빌교회에 죤 브레덴벅 목사가 다년간 설교를 하였으나 그 교역은 실패라고 스스로 느낀 채 용기를 상실한 중에 별세 하였다. 그 후 일주일이 채 못가서 2백 명의 새로운 신자가 나왔는데 거의가 다 자백하기를 브레덴벅 목사의 교역에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서양의 어떤 목사가 자기 평생에 자기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다고 자백한 후 세상을 떠났다. 장례날은 비가내리고 음침하였다. 묘지에는 상여를 맨 사람, 무덤을 파는 사람, 주례하는 목사 외 다른 한 사람의 조객뿐이었다. 목사가 하관식을 마치고 돌아보니 조객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목사는 가까이 가서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당신은 그의 친척이요." "아닙니다." "그러면 그 교회의 교인이요." "아닙니다. 나는 친척도 교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이 내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고 하였다.
앞으로 가는 것밖엔
미국의 유명한 여류 비행사 가운데서 아멜리아 할크라는 여자비행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대서양 횡단에 처음으로 성공을 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한복판을 건너가고 있을 때 엔진 고장이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용케 그 위기를 모면하고 항공운행에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고 돌아와서 보스턴에서 기자회견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기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엔진이 고장 났을 때 그 위급하고 어려운 순간을 어떻게 견딜 수가 있었습니까?" 이때 그녀는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을 간단한 사실입니다.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제가 바다 위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이 무슨 이야기냐고 기자들이 반문하자 그녀는 다시 말합니다. "저는 그때 벌써 반을 넘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떨어지면 죽을 테고,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가는 것밖엔 없었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앞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는 앞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앞으로 가시겠습니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모두 막혔지만 앞으로 갈 길을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하고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흔적
설교자이자 학자인 알버트 슈바이처가 한번은 미국의 어느 도시에 연설을 하러 오게 되었다. 이 도시의 가장 저명한 사람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슈바이처가 도착하는 열차 시각에 맞추어 마중을 나갔다. 슈바이처가 열차에서 내리자 대표단은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들은 슈바이처와 인터뷰를 하고 사진도 찍을 예정이었는데, 슈바이처는 "여러분 잠깐 실례합니다."하고는 많은 짐을 진 어떤 나이든 노부인에게 다가가서 많은 짐 꾸러미를 대신 들고서 노부인이 안전하게 택시를 타도록 도왔다. 그리고는 놀라 서 있는 대표단에게 돌아왔다.
이런 일에서 그는 확실히 선한 일을 행하시던 예수님의 아련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우유 한 잔
고학생 하워드 켈리(Howard Atwood Kelly :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설립자)는 학비를 벌기 위해서 방문 판매를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방문판매를 하던 어느 날 그는 배가 몹시 고팠으나 가진 거라곤 동전 하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다음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로 하였다. 켈리가 어떤 집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자 한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문을 열었다. 그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밥을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물 한 컵만을 부탁하였다. 그녀는 켈리가 몹시 배고파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큰 잔에다 우유를 가득 담아 건네주었다. 켈리는 우유를 다 마신 후에 그녀에게 말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나요?” “안 주셔도 돼요.” 젊은 여성이 말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늘 저에게 좋은 일을 하거든 절대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어요.”그러자 켈리가 말하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집 밖으로 나온 켈리는 힘이 솟는 듯했을 분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애정도 더욱 강해지는 듯했다. 공부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하였다. 하워드 켈리는 우유 한 컵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몇 년 후 그 여인은 현지 의사가 힘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큰 병을 얻었다.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대도시로 보내 전문가를 찾아 병을 치료 하려고 하였다. 사람들은 하워드 켈리를 데리고 왔다. 여인의 고향의 이름을 들은 켈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2층 병동으로 올라간 켈리는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우유 한 컵을 준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모든 힘을 다하여 그녀를 살려내겠다고 결심하였고 많은 시간과 노력 끝에 그녀를 살려내었다. 켈리는 치료비 영수증을 가지고 와서 한쪽 여백에 글을 한 줄 적은 후에 사람을 시켜 여인의 병실에 갖다 주도록 했다. 여인은 차마 영수증을 꺼내볼 용기가 없었다. 남은 인생을 모두 치료비를 갚는데 써야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영수증을 열어 보자 “당신의 치료비는 여러 해전 우유 한 컵으로 모두 지불되었습니다.” 라고 글이 쓰여 있었다. 뒤에는 하워드 켈리라는 서명이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희열의 눈물로 충만하였고, 그녀는 마음 속 깊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위선적인 기도자
하루 일이 끝났을 때 나는 무릎 꿇고 기도했다. "오! 주님 모든 사람을 축복하시고 모든 슬픈 마음으로부터 고통을 덜어 주시고 병든 자를 다시 건강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깨어났고 내가 한 기도와는 달리 나의 길을 갔으며 하루 종일 아무도 돌봐 주지 않았다.
나는 어려움에 처한 어떤 형제의 짐도 함께 나누려 하지 않았다. 나는 바로 내 옆방에 있는 환자를 문병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도했다. "오! 주님, 모든 사람을 축복하소서." 그러나 내가 기도하는 동안 내 귀에는 속삭이는 목소리가 분명히 들려왔다.
"멈춰라, 위선자여. 기도하기 전에 너는 오늘 누구를 축복하여 주었느냐? 하나님의 축복은 네가 살고 있는 곳에서 너의 손을 통하여 항상 베풀어지니라." 그 때 나는 나의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제게 또 다른 날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기도한대로 살겠습니다."
혹시 이러한 삶이 우리의 삶이 아니었는지.
위선적인 종교인
시골에 사는 한 장사꾼이 행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친 몸을 잠깐 쉬어갈 양으로 양지바른 산 중턱 큰 바윗돌 옆에 짐을 풀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면서 바윗돌에 기대어 있다가 우연히 호랑이 꼬리를 발견했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호랑이가 큰 바윗돌이 갈라진 틈에 앉아 있는데, 그 행상은 도망가나 그대로 있으나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바윗돌 틈새로 나와 있는 호랑이의 꼬리를 움켜쥐고 두 발을 바위 돌에 버티어 있는 힘을 다하여 잡아당기고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는데 마침 그 길을 지나는 스님이 있음을 보고 반가워하며 장사꾼은 스님에게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큰 돌을 집어 호랑이 머리를 쳐서 죽여 달라고 부탁을 하자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장사꾼을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나는 불도를 닦는 사람인지라 살생할 수가 없소"하고는 그냥 가는 것이었다.
장사꾼이 생각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난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기에 다시 스님을 불러서 "그러면 이 호랑이 꼬리를 놓으면 호랑이가 나와서 나와 스님을 물어 죽일 것이 뻔 한데 그렇게 되면 되겠소?"라고 말하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하고 스님이 반문했다. 장사꾼은 "내가 호랑이를 죽일테니 스님이 이 꼬리를 잡고 있으면 우리 둘이 살 수 있소"라고 말하자 스님은 장사꾼의 말대로 호랑이 꼬리를 붙들었다.
임무를 교대한 장사꾼은 여유가 생겼다. 땀을 씻고 털썩 주저앉더니 서산에 지는 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보따리를 챙겼다. 이를 보고 스님이 빨리 호랑이를 죽이라고 소리를 치니까. 그 장사꾼이 하는 말이 "스님의 말씀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감동되는 바가 있어 이제부터 나도 불제자가 되고 싶습니다"하고 스님께 합장을 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윌리암 제임스
심리학자이며 작가이기도 한 윌리엄 제임스는 [모든 사람은 도덕적으로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착한 일을 한 가지씩 해야만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도덕적 [근육]들을 계속 사용하고 운동을 함으로써 자라난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일어나는 작은 유혹들로 그 근육들을 사용함으로써 물리칠 수 있다고 또 더욱 강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화속의 한 젊은이와도 같다. 그는 들판에서 갓 태어난 송아지를 데리고 와서 밖에 나갈 때면 언제나 그의 팔에 안고 다녔었다. 송아지의 무게는 매일 늘어났지만 젊은이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매일매일 송아지를 안고 다니자 그의 힘도 송아지의 무게가 늘어나는 것과 같이 늘어 커다란 소가 되었을 때도 그 소를 들 수 있었다.
일종의 병인 가장
중국 주시대의 사상가 노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바 있다"학식이 많아도 자랑하지 않는 데에 높은 도덕이 있다. 얼마 안 되는 학식을 가지고 학식이 많은 척 하는 것은 일종의 병이다"라고. 실로 가장은 언제나 병의 일종이다.
사울왕도 심령에 욕심이라는 병이 든 때, 아말렉을 쳐서 얻은 물건을 가지고도 안가진척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던 것이다. 있고도 없는 척, 가지고도 안 가진 척, 없으면서도 있는 척 하는 가장은 모두 병인 것을 기억할 것이다.
잃은 것과 가진 것
'우리 생애 최고의 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헤롤드 럿셀이라는 공수부대원이 전투에 나갔다가 포탄에 맞아 두 팔을 잃어 불구자가 됩니다. 그는 참혹한 좌절에 빠집니다.
“나는 이제 쓸모없는 하나의 고깃덩어리가 되었구나.”
그런 가운데 그에게 차츰 진리의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잃은 것보다 가진 것이 더 많다고 자각하게 됩니다. 의사가 그에게 의수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글을 쓰고 타이프도 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화화되어 직접 불구자의 모습으로 출연하게 됩니다.
그는 정성을 다해 연기를 합니다. 그해 그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탑니다. 그 상금은 상이용사를 위해 기부합니다. 어떤 기자가 찾아와 물었습니다.
“당신의 신체적인 조건이 당신을 절망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결연히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나의 육체적인 장애는 나에게 도리어 가장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잃어버린 것을 계산할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것을 사용할 때 잃은 것의 열 배를 보상받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만 눈을 돌릴 때 그곳에는 오직 절망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잃은 것을 넘어 가진 것을 세어보면 더 많은 가능성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으로 믿는 믿음
미국 남부의 어떤 지방에서 부흥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설교자는 밤 집회에서 마귀에 대하여 설교하겠노라고 광고를 하였다. 그러자 그 동네의 꼬마 아이들이 그 늙은 설교자를 놀려 주려고 작당하였다.
한 아이가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신으로 변장하였다. 그는 빨간색의 옷을 입고 여러 갈래의 꼬리를 달고 손에는 큰 갈퀴를 들고서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예배당의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계단 문 뒤에 숨어 있었다.
예배가 시작하여 찬송과 기도와 헌금의 순서가 끝났을 때 설교자는 마귀에 대한 그의 설교를 시작했다. 설교자의 설교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에 갑자기 계단 문이 활짝 열리면서 귀신으로 변장한 소년이 마루로 뛰어내려와 손에 큰 갈퀴를 들고 설교자를 향하여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두려워서 밖으로 재빨리 도망갔다. 그때 설교자는 무릎을 꿇고 “오. 마귀 선생님.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입으로만 말했지 마음은 당신과 함께 있답니다. 마음은 당신을 향해 있습니다.”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빌었다.
이것은 입으로만 큰소리를 지르고 행동이 없는 사람의 일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혀 고난과 핍박을 당하지 않는 상태에서 안일하게 믿고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어려움보다도 편안함을. 실천하기보다는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위선적인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주유소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
캘리포니아의 어느 조그만 마을에 사범 교육을 받고 있는 흑인 청년이 있었다. 그는 자격증을 따기까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주유소에서 부업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고객들은 백인에게서만 휘발유를 사려고 하면서 흑인 청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주인은 고객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는 것을 눈치 채고 흑인 청년을 해고시키려고 했다. 이때 이웃에 사는 한 여인이 주인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이 청년을 고용하고 나서 몇 사람의 고객을 잃은 것 같습니까?” “약 18명 정도, 아마 20명쯤 될 겁니다.” “제가 20명의 새 고객을 끌어들인다면 저 청년을 계속 고용하시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이 그리스도인 여인은 20명뿐만 아니라 5명을 더 끌어들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입과 귀를 통해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서는 이 이야기를 기사로 게재하게 되었다. 이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이 여인의 지혜에서 큰 용기를 얻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아주 단순한 친절이라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참된 선행
러시아의 한 전설에, 아름다운 궁전이 있는데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만 열쇠가 주어져 그 궁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한 소녀는 이 궁전에 꼭 들어가고 싶어서 머리를 예쁘게 빗고 아름답고 깨끗한 옷으로 단장했다.
그러나 궁전 문지기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되며 매일 아침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일러주었다. 새 비법을 발견한 소녀는 길거리로 나가 도와줄 사람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다 길거리에서 늙은 거지를 만나 주머니에 있던 돈을 전부 주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열쇠를 주지 않았다. 거절당한 소녀는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오다 짐을 잔뜩 짊어진 할머니가 언덕을 오르느라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녀는 할머니를 열심히 도왔다. 그리고는 문지기에게 달려갔으나 또 거절당했다. 크게 실망한 소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그냥 돌아가려고 숲을 지날 때였다. 소녀는 가냘픈 신음소리를 들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사냥꾼이 쳐놓은 덫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다.
소녀는 불쌍한 강아지 생각에 자기 자신을 다 잊어버린 채, 그 강한 덫을 손과 발로 온 힘을 다해 벌려서 강아지를 살려냈다. 소녀의 손과 발은 찢어졌고 피가 흘렀다. 그러나 치마를 찢어 강아지의 상처를 싸매주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먹이를 주었다. 이때 궁전 문지기가 나타나서 궁전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소녀에게 주었다. 소녀는 놀라서 말했다.
“나는 열쇠를 얻으려고 강아지를 살려준 것이 아닌데요.” 문지기는 차분한 소리로 소녀에게 말했다. “이 열쇠는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남을 돕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보상을 바라고 행해지는 선행도 많다. 그러나 참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선행이란 아무런 보상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 선행이다. 그것만이 참된 선행이다.
최선
1956년, 공산주의자들이 헝가리에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였다. 다리가 없는 스물다섯 살 된 청년이 두 손으로 걸어서 조국 헝가리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신체적인 결함이 있는 이 젊은이는 어떠한 위험이나 희생을 치르고라도 자유를 택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15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오스트리아 국경을 향하여 탈주의 여정에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10마일가량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자전거와 자동차를 타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5마일은 자신의 두 손을 발삼아 걸어야만 했다. 그 동안 줄곧 국경 지대를 순찰하고 있던 붉은 군대의 기관총소대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우리들 중에 이러한 신체적인 결함과 위험천만한 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인생의 순례자로서 크고 작은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을 직면해야 한다. 모든 것이 암담하고 절벽같이 생각되는 l때라 하더라도, 또 악의 무리들이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때라 하더라도, 천국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지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래도 희망은 있게 마련이다.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달려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천국을 향한 발걸음을 내어 딛어라. 최선을 다 하여 줄기차게 내어 달려라.
최선의 방법은
어떤 섬유회사의 작업실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 있었다.
"만일 실이 헝클어져서 풀 수 없을 때 현장주임에게 도움을 구하시오"
어느 날 새로 입사한 여직원이 일을 하다가 실이 헝클어졌다. 그녀는 그것들을 풀어보려고 애썼지만 결국은 일을 모두 망치고 말았다.
그제야 그녀는 현장주임에게 가서 상황을 이야기하였다. 현장주임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
"당신은 일이 잘못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보았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최선을 다해 실을 풀어보려고 노력했다고 대답했다.
현장주임이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왜 당신은 나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묻는 말에 여전히 최선을 다했다고 만 대답하였다.
이 말에 현장주임은 그녀에게 다시금 주지시켰다.
"아닙니다. 당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명심하십시오. 당신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일이 잘못되기 전에 나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Moody Monthly)
최선의 삶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벽화를 손수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 천정은 까마득히 높았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사실 천정의 모습이 한 눈에 정확하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이 천정의 벽에 가까이 붙어서 선 하나 하나를 정성을 다해서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친구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해두고 내려오게나."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천정에서 그 친구를 향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여보게, 이 그림을 다 그린 후에 이 그림의 성과가 어느 정도인가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야 자네겠지." "맞네.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최선 이하로 일할 수는 없네."
자기의 삶은 자기가 제일 잘 압니다. 자기의 삶에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주어진 시간 속에서 주어진 과제를 위해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자신이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나를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내 양심 앞에서 내게 주어진 이 삶의 과제를 위해서 당신은 얼마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태양 앞의 촛불
일전에 칠순이 넘으신 어떤 노신사를 만나 전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딸이 자기의 힘으로는 부족하니까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 오시자마자 자기 아버지를 전도해 달라고 목사님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 어른이 저에게 참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70년이 넘도록 살면서 손톱만큼도 나쁜 일을 안 했소. 내 재산으로 남에게 구제사업도 많이 했소. 학교도 세워서 공부도 시키고 좋은 일을 많이 했소. 그러니 천당이 있다면 나를 그렇게 어럽지 않게 들여보내 줄 것이오." 그 말을 듣고 제가 잔인하리만큼 단호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너무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예요. 그래서 선생님이 손톱만큼도 잘못을 안했다는 그게 정말 별거 아니에요. 마치 태양 앞의 촛불 같다고나 할까요? 어두움에서는 촛불이 굉장하지요? 그러나 태양이 솟아오르면 촛불은 너무 의미가 없잖아요? 손톱만큼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은 사람 앞에서는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가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조금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하고, 약간 구제사업 했다고 하는 것 전부 촛불예요. 선생님 그것 가지고는 구원 못 받아요. 천당 못 들어갑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랬더니 그 어른이 시무룩해서 앉아 있어요. 지금이 성령이 일하시는 시간이구나 생각하고 제가 예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씀을 드렸는데 그 어른이 침묵을 깨고 드디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시골에 내려가서 교회에 나가겠소. 가족들과 집안 대소 간에 의논해서 나가기로 하겠소."
한낮의 악마
프랑스의 작가 부르제의 작품 '한낮의 악마'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윤리와 종교사이의 샌드위치가 되고 마는 인간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즉 천주교 신자인 사비니앙 교수는 상처한 후에 결혼 전에 사랑하던 여인과 재혼을 하는데 그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되지만 그 아들은 자살하고 맙니다.
부모의 재혼이 가져다 준 자녀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 반응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 이처럼 비극을 초래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주인공은 마음속으로 방황하게 되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고독과 상실의 엇갈림이 생기고 맙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선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일이 타인의 눈에 비칠 때는 악하고 좋지 않다는 평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독선적인 인물이 되고 위선자의 낙인을 받게 될 것입니다.
힘껏 최선을 다하니!
개구리 한 마리가 길에 파여진 꽤 깊은 구멍에 빠졌다. 친구 개구리들이 도와주며 아무리 꺼내어 나오게 하려해도 모든 게 허사였다. 결국 친구 개구리들은 포기하고 다 가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튿날이었다. 친구 개구리들이 보니 어제 구멍에 빠졌던 그 개구리가 신나게 깡충거리며 지나가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친구 개구리들이 도대체 어떻게 그 구멍에서 나왔는가고 물어보았더니 그 개구리가 다음 과 같이 대답을 했다.
"글쎄 말이야, 자네들이 다 가버리고 내가 구멍에 빠진 채로 있는데 저 앞에서 큰 트럭이 한 대 이 길로 오고 있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그 구멍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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